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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 인생 변곡점 “사건을 통해 사람이 바뀌더라”[리더스]완도 노화 출신, 재심전문 박준영 변호사
박주성 기자 | 승인 2016.12.30 09:30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되면 세상이 좀 달라질 줄 알았다. 그러나 전라도 섬마을 노화도에서 태어나 대학 졸업도 못하고, 딸린 가족들이 너댓명... 고향사람들이나 친구들은 다 내 의뢰인이 될 줄 알았는데, “너까지 게?”라는 식으로 쳐다만 보았다. 세상 인심이 변호사가 되었는데도 이른바 학벌과 인맥이 부족한 ‘빽’없는 설움을 절감했다.

그러다보니 돈을 벌어야 하니 국선변호사 일을 맡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국선변호 일을 맡아 수입도 조금 짭짤해 졌다. 그런데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을 맡으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사건에 관심이 크지 않았지만, 공권력의 위법성과 피해자의 아픔을 함께하며 사건을 통해 그는 달라져 가고 있었다. 남들이 안하는 것을 통해 이름도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삼례 나라슈퍼, 익산 택시기사 살인 사건 등 억울한 사법피해사건을 일부러 선택하기도 했고, 또 보험금을 노리고 아버지를 죽였다는 김신혜 사건의 경우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맡아보라며 권유를 받아 맡기도 했다. 어쩌다보니 재심전문 변호사가 돼 있었다.

유명세는 타 가는데 어렵고, 빽없고, 지적장애를 가진 의뢰인들에게 수임료를 받을 수는 없었다. 빚내서 재판을 준비하다보니 ‘파산’직전으로 내몰렸다. 가뭄의 단비처럼 그때 오마이뉴스 박상규 기자를 만났다. 그의 호소력 있는 글을 통해 재심사건 후원금 펀딩이 몇차례 성공하고, 나아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하나도 거룩하지 않은 파산변호사’ 스토리 펀딩이 약5억6천만원 후원금이 모아지며 성공적으로 잭팟(?)을 터트렸다.

이쯤이면 누군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올해 사법불신이 팽배한 가운데 사법정의를 앞장서 실현한 ‘재심전문 변호사’ ‘파산변호사’라는 호칭이 더 유명한 박준영 변호사(43)를 만나 완도신문에서 유년기 완도생활부터 ‘파산변호사’ 펀딩 성공까지 전반적인 이야기를 들어봤다.

노화 출신이라고 들었다. 어린 시절 추억이 있나?
부모님 두분 다 노화 구목리 출신이다. 제가 태어났을 때 목포에서 사업을 하시다 망해서 노화로 내려왔다. 어렸을 때라 기억이 없다. 목포에서 태어난 것은 같은데, 노화에서 크고 자랐다.
어렸을 때 기억은 많이 나지 않는다. 기록을 하는 습관이 없다. 그래서 기억에 의지해야 하는데,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많았던 것 같다. 가정환경이 그리 행복하진 않았다.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를 보면서 한때는 싸우고 사는게 부부인가?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어머니가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고,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됐다. 광주로 전학을 갔는데 그때부터 아버지한테 불만도 생기고, 방황을 많이 했다. 그런다 아버지가 “졸업장이라도 따야 될 거 아니냐”에 노화종합고등학교로 다시 전학을 갔다.

사시 최종합격 전 아버님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던데.
1차에 합격하고 2차 보던 때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셨다. 임종 전 추석날 어머니 생각이 많이나서 서운함 때문에 아버지와 대판 싸웠다. 그때 불효, 미안함 이것이 제 인생을 결정한 것도 있다. 부모님을 이기려 했다는 후회감, 갑자기 보낸 것에 대해 미안함이 컸다.

사법시험에 도전한, 변호사가 된 계기가 무엇인가?
아버지 사망 진단서와 의료기록을 챙겨들고 변호사를 찾아갔다. 돌아가시지 않아도 됐을 분이 잘못된 대응으로 돌아가신 거다, 도와 달라, 애통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무료 상담을 해주겠다고 지역신문에 광고까지 냈던 변호사는 제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무료법률 상담을 해주는 모든 변호사가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이 아픈 경험이 저를 여기까지 오게 하는데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다. 내가 좋아서 베푸는 어설픈 선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상대에게 더 큰 고통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다 군대 가서 배병장을 만난 것이 변호사가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당시 경북대 법대생인 배병장과 25개월 같이 있었다. 법의 법자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의 공부 방법을 그대로 따라했다. 제대한 후에도 연락하고 살았는데, 판사로 재직 중이신데 지금도 저를 신기해 한다.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이 인생의 변곡점이었다고 들었다.
대한민국에 수많은 변호사가 있는 상황에서 사람이 돈을 버는 것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요할 수 있다. 그런데 제 위치에 대한 정립은 하면서 살고 싶었다. 제가 이사회를 살면서 박준영이라는 개인과 직업인으로서 변호사 박준영으로 살면서 의미있게 살다 가야 된다는 소신이 있었다. 의미있게 살려면 세속적으로 보면 유명해져야 된다. 의미 있는 사건을 맡아 의미 있는 결과를 내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수원 사건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고, 사건이 계속되는 과정에서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이 사건 당사자들 아픔도 느끼게 되고, 공권력이 이들에게 했던 위법한 부분 일선에서 느끼게 되니까 사람이 바뀌게 되더라. 처음엔 “당신들이 잘못했다”고 검사나 판사에게 말하기도 부담스러웠다. 재심재판 말미 가니 제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핏대 세워 검사나 경찰에게 항변하고 있었다. 제가 변호사 인생을 걸으면서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건이 사람을 바꿨다는데 있다. 바로 저를.

사법부에 대한 불만과 사과를 강력히 토로하더라. 우리 사회 사법시스템은 어떠한가?
전국 어디든지 법원·검찰 건물에 불켜진 곳 많다. 개인적으로 법원 근무 판사나 직원, 검찰청 근무 검찰나 직원, 경찰 등이 열심히 일하고 소신 갖고 격무에 시달리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열심히 일함에도 사법불신은 계속되고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물론 소신있게 열심히 하시는 분들에게 죄송한 얘기지만, 법조 비리 계속 불거지고 있는 분위기고 사법피해자 계속 양산되고 상황이나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고, 사법시스템상 운영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다고 하는 건 곤란한 부분이 있다. 저는 재심영역에만 국한돼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재심전문으로 나갈 생각이 있었나?
처음부터 재심 사건만 맡는 변호사가 되어야지, 생각했던 건 아니다. 당연히 돈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돈이 있으면 삶을 편하게 살 수 있으니까. 학벌 안 좋고, 성적 안 좋은 제가 변호사 생활하려니 국선을 했고, 그러다 수원 노숙 소녀 사건을 만났다. 또 탈북자 간첩사건을 맡아 하게 됐고, 자꾸만 관심이 공익적인 사건들로 쏠리게 된 것이다.
수원 노숙 소년사건 이후 억울하다는 사건이 자꾸 보인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억울한 사건이 많았구나 싶었다. 수원 노숙 소녀 살인사건이라는 운명적인 사건을 만났고, 정의로운 결과를 내서 유명해지고 싶다는 동기도 있었지만, 주저하지 않고 애썼더니 제게 ‘재심 전문’이라는 으름이 붙게 됐다.

재심재판 준비과정의 어려움은 없나?
새로운 증거 수집하는데 있어서 증거수집이란 게 국가기관이 공권적 권한을 갖고 자료를 수집한다면 그렇게 어렵지 않겠지만, 개인이 그런 공권적 권한없이 사람 만나고 자료 수집하는 건 증거수집이나 조사의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는 가능하다, 잘될 거다, 기대를 가지고 시작하나 당사자는 한번 사법피해를 겪은 상황에서 기약없이 계속되는 재심절차 그 기간을 인내하는 것에 힘들어한다. 그런 부분까지 우리가 케어하면서 갈 수 없다는 게 또 문제다. 그런 부분이 어렵다.

파산 직전 스토리펀딩이 성공했다. 심정이 어땠나?
때로는 절벽 끝에 서야 한다고들 한다. 처음에는 저도 이말이 와 닿지가 않았다. 절벽 끝에 선다고 해 봐야 떨어져 죽는거지, 뭐 새로운 길이 열리겠나 싶었다. 그런데 이제야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절벽까지 가는 상황만 잘 관리한다면 절벽에서는 가장 극적이고 강렬한 선택을 하게 될 것이고, 그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된다고 말이다.
일단 장기간이라 후원금 1억은 모을 수 있겠다 생각했다. 스토리펀딩 기사 댓글에서 비아냥 거리는 그런 내용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좋은 시선이 아닌 목소리가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없이 마무리 지어서 많이 놀랐다. 좋은 일 한다고 해도 비딱한 시선으로 보는 분 있는데 그런 분들이 그런 글 쓸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대세에 지배당한 느낌이었다.
한편으론 최유정, 홍만표, 진경준 사건으로 사법불신의 팽배한 상황에서 사법 정의를 바라는 국민들의 성원을 얻기에 시의 적절했다고 생각했다. 펀딩이 조금 늦게 시작했다면 최순실 사건을 맞닥드렸다면 가능했을까 그런 생각도 해본다. 막판에 후원금이 많이 올라가 “며칠만 더 했으면 좋았겠다” 그런 아쉬움도 있었다(웃음)

스토리펀딩 성공은 어떤 의미인가? 부담은 되지 않았었나?
첫째는 우리 국민들에게 측은지심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고통 앞에 침묵하지 않는다. 억울한 사람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활동을 했기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 겪는 나에게 우리 국민들이 측은지심으로 후원해 주신 거다.
두 번째는 “앞으로 이런 일을 더 해줬으면”하는 우리 사회 정의에 대한 열망이다. 아이들의 앞날, 살아갈 세상에 대한 진지한 고민, 기대가 담겨 있다. 당신을 후원해 줄테니니 좋은 세상 만들어봐라 라는 저에 대한 기대도 거기에 들어 있다고 본다.
억울한 사람이 세상에 너무 많다. 그 억울함을 개인 역량으로 풀어주는 건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 외면할 사항도 아니다. 제 개인역량으로 피하는건 또다른 피해를 준다. 좌절을 안겨준다. 억울한 사법피해는 사회적 시스템에 의한 불이익이다. 저는 사회적 혜택을 받는 사람이다. 사회적 혜택을 받는 나에게 요구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어려운 사람들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라면 그렇게 살아야 될 필요도 있다. 그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부분도 있다. 솔직히 부담이 많이 된다.

재심전문 변호사로 불리다 펀딩 성공 후 파산전문 변호사로 더 유명해진 것 같다.
어떻게 불리든 관계없다. 재심전문 변호사는 좀 부담스럽다. 재심분야에 잘 알고 있지만, 전문이란 용어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재심의 판결을 뒤집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다. 파산변호사도 자꾸 듣다보니까 능력 없어 보인다(웃음) 그냥 평범하게 불리는게 가장 좋다. ‘우리들의 변호사’?(박변호사가 쓴 책 제목을 질문했다) 새로 나온 책 우리들의 변호사도 부담스럽다. 용어 자체에 개인 역량의 한계를 느낀다. 책은 마케팅 차원에서 제목을 선정한 것이다. 제목 선정함에 출판사에 일임할 수 밖에 없다. 책은 많든 적든 저자 불이익은 없으나 적게 팔리면 출판사에 불이익이 간다. 박상규 기자와 공동으로 집필한 ‘지연된 정의’가 제가 쓴 책보다 내용이 호소력있고 재밌더라.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사법정의’란 무엇인가?
일단 억울한 사람이 없어야 한다. 인간이 하는 시스템이라 완전하지는 못할 것이다. 못해도 줄이기라도 해야 된다. 억울한 사람 없애는 시스템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약자이기 때문에 대부분 약자 보호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사법제도 그게 정의라고 생각한다.

완도발전을 위한 제언을 한다면?
세상은 ‘좋은게 좋은 것이다’보다 우리사회는 비판과 견제 통해 발전하고 있다. 좀 불편하고 싫더라도 지적해주고 그 지적을 듣는걸 당연히 생각하면서 발전의 계기로 삼는게 올바른 사회다.
비판과 견제가 지역사회로 들어가면서 옅어진다. 밀착관계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완도신문도 갈수록 옅어지는 관계를 극복하면서 비판과 견제 언론이 됐으면 좋겠다. 내 입장에서 불편하더라도 좋은 언론으로 받아들여지는 그런 사회분위기가 형성됐으면 좋겠다. 완도가 비판언론 살려주는 그런 선례로 남았으면 좋겠다.

앞으로 계획은?
구체적으로 뭘 해야 되겠다는 것보다. 일단 사람은 살아온대로 살아간다. 그게 가장 자연스럽다. 그걸 무시하고 새로운 배치되는 길 갔을 때는 뭔가 문제가 생긴다. 억울한 사업피해자들과 그 목소리를 듣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런 형태의 공익변호사 일을 계속 할 것 같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좋은 일도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동한다면 좋은 일이 일어날 겁니다. 우리가 단순히 직업인의 삶을 살아가지 않고 행동하는 동안, 그 과정에서, 우리가 원하는 변화가 일어나건 일어나지 않건 간에 우리는 더욱 흥미진진하고 즐거우며 보람있게 살 것입니다. 앞으로 무엇을 이루건, 우리가 내내 무언가 가치 있는 일에 참여했다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역사를 기억하라' 하워드 진."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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