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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도재 공은 서럽구나!

[완도설군 120주년, 설군의 아버지]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6.12.30 09:49
  • 수정 2017.01.01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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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 이도재 공의 모습. 이사진은 고금 청용리 박종술씨가 보관해오다 2015년 증손 이경훈 옹에게 전달했다.


완도군은 올해 2월3일자로 설군 120주년을 맞이했다. 그러나 5월 장보고수산물추제와 군민의 날 등 행사에 밀려 따로 기념행사조차 진행하지 않아 설군 120주년에 대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그런 와중에 설군 주역인 이도재 공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설군 주역에 대한 종합적이고 명확한 평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다.

온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지못한 이도재 공으로서는 당시 완도군이 여러 도서로 나뉜 상태에서 섬사람들의 애환을 온몸으로 느껴 도서만으로 이루어진 완도군을 설군한 공으로서는 설군 120주년을 맞아 서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완도군 설군은 오로지 이도재 공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공은 민씨 정권이 장악한 조정에서 김옥균의 갑신정변에 연루돼 고금진으로 종신유배를 온 인물이다. 고금진에 와 유배에서 벗어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지만, 동학농민운동으로 인해 개화파 김홍집 내각이 출범하면서 유배에서 해제돼 조정의 벼슬길에 다시 나서게 된다.

구한말 개혁 흐름에 전반적으로 동참한 청렴한 소신파 관료
구한말 복잡한 국내외 정세 흐름 속에서도 이도재 공은 고금 유배 기간 섬사람들이 당한 갖은 핍박과 관리들의 학정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흥에 유배를 갖다 환조한 지기 신기선과 함께 서남해의 도서를 모아 완도군, 돌산군, 지도군을 설군하는데 앞장선다. 개화파 중앙관료로서 이도재 공이 당시 조정에 없었다면 설군은 어려웠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이도재 공의 관료생활은 유능하고, 청렴하며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 조정이 부강해지려면 개화가 필요한 것을 인식하였고, 정치활동 측면에서 보면 개혁의 흐름에 동참하는 개혁적, 진보적 인물로 분류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도재 공이 관료계에 진출한 1882년 바로 그해에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임오군란은 청나라의 무력 간섭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고 실권자인 민비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민심도 크게 동요되고 있었으므로 쿠데타의 소용돌이 속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민비는 민심 수습을 위하여 각도에 암행어사를 보냈다.

홍문관 부수찬이었던 이도재 공도 어사 인선에 선발돼 8월에 경상좌도 어사가 돼 영남지방으로 내려갔다. 인선에 뽑힌 사람들에는 박영교, 이건창 등 쟁쟁한 소장 관료들이 포함됐다. 비록 경상좌도 어사는 임시직이었으나 심제공이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공은 경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태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해 신속하게 재판했는데, 공의 능력에다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그의 공명정대 함이 합쳐서 공평무사하고 깨끗한 일처리 솜씨가 조정에 인상적인 일로 받아 들여졌다.

암행어사직을 수행하면서 가장 대표적인 일화는 부산 기장군의 ‘어사암’과 관련된 것이다. 부산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두모포에 가면 어사암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에는 오언구절과 어사도 이름 이도재(李道宰)와 기(妓) 월매(月每)라는 글씨만 희미하게 지금까지 남아 있다. 또한 거쳐가는 곳마다 송덕비와 영세불망비가 세워질 정도로 이도재 공에 대한 백성들의 신망은 상당했다고 남아있는 자료에서 확인된다. 삼정이 문란한 구한말 조선에서 청렴하고 모범적인 관료로서 백성들에게 신망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비범함을 말해준다.

동학농민운동 수뇌부 체포·처형 부정적 인식 심어 놔
그러나 이도재 공이 조정으로 다시 복귀한 후 맡겨진 임무는 전라도 관찰사로서 동학농민운동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이때 이도재 공은 동학농민운동의 수뇌부인 김개남과 전봉준을 생포한 것이 역사적으로 두고두고 논란이 되고 있다. 심지어 전남 광양에 송덕비의 경우에도 광양 어느 신문에 “동학농민군 김개남을 생포한 관리”라며 이도재 공을 평가절하한 뉴스가 나온 적도 있다. 

그런데 사실 이때의 동학농민군은 이미 큰전투에서 조정과 일본의 연합군에 의해 패퇴한 상황으로 이도재 공의 역할은 패배한 농민 반군에 대한 체포가 임무였던 셈이다.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가 백범 김구가 이끈 황해도 해주 동학군을 진압한 사실은 그 당시 반외세에 대한 의식은 지배층이나 피지배층 모두 있었으되, 계급 또는 계층적 신분제 질서 붕괴에 대해서는 지배층에선 수긍하기 힘들었던 점을 엿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동학농민군 수뇌부를 검거해서 그런지 이도재 공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지나친 감이 있다고 보여진다.

재미있는 것은 2011년 동학학보에 게재된 강효숙 원광대 강사의 ‘동학농민군 탄압 인물과 그 행적’ 논문에도 이도재 공이 동학농민군의 수뇌부를 체포한 것에 대한 반감은 있으나, 1896년 단발령 강행에 반대 상소를 올린 후 관직을 버린 것이나 다시 복직해 1898년 외부대신으로 러시아에 굴복하지 않고 절영도 조차를 반대한 것, 1903년 초 외부대신으로 서간도 이주민들을 민병대를 조직해 중국인 왕씨 일가에게서 보호한 것, 헤이그 밀사로 이준 열사로 보낸 것 때문에 매국노 이완용에게 체포된 것 등 이도재 공에 대한 긍정적 활동이 기술되었다는 것이다.

완도 설군 주역 심제 이도재 공, 자료수집·연구 통해 온당한 역사적 평가 받도록 해야
이도재 공에 대한 지역내 연구활동도 지지부진한 편이다. 이도재 공을 연구해 온 완도문화원 정영래 이사는 “동학 수뇌부를 체포하고 진압했다는 역사적 논란이 가장 큰 요인인 것 같다. 또한 다른 지자체에 비해 설군 주역에 대한 활동이 활발하지 못한 것도 있다”고 그 배경에 대해 지적했다. 정 이사는 최근 이도재 공 자료가 증손인 이경훈 옹에게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완도군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설군 주역인 이도재 공 자료를 확보해야 된다, 공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진행할 곳은 우리 완도군이다.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120년이나 지났지만, 말로만 설군 주역으로 인정받는 이도재 공. 과연 완도군, 완도군민들에게 이도재 공은 어떤 인물로 인식되는가 지금에 와서 되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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