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낯선 곳, 펑펑 울어 본 날이 그 얼마였던가!

[나의 반쪽]이수화 독자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17.01.26 06:43
  • 수정 2017.01.26 06:50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저, 좋은 시 한 편을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비행기를 탔다. 정든 고향, 부모님, 잘나가는 직장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거기서부터 내 운명은 바뀌기 시작하였다. 2003년 3월 5일. 지금도 잊지 못해 나의 아이디로 남아있는 날. 자유 대한민국에 첫발을 디딘 날.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난, 흔히 말하는 조선족이다. 부모님의 고향이 함경북도이다 보니 나서부터 조선말 아니 한국말을 배웠고, 사범대를 조선어교육학과를 나와 한국말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직장생활을 하던 중 한국행을 결정하였다.

그렇게 나이 많은 늦깍이 유학생의 유학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 남편도 시인이 되고저 하는 큰 뜻을 품고 낮에는 바다에서 일을 하고 일 마치고 광주대 야간 수업을 들으러 다니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광주는 왕복 네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음에도 일주일 네 번은 다녔으니 남편의 꿈에 대한 도전은 교수님들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런 남편을 이쁘게 봐주던 선배분이 둘이 잘 어울릴 것 같다면서 주선을 해주셔서 어느 꽃피는 봄날 우리는 학교앞 카페에서 만나게 되었다. 지금이야 완도 섬사람 특유의 사투리를 쓰는 바다사나이였지만 그때는 점잖은 모습으로 유머스러웠던 남편은 꽤 매력적인 남자였다. 사랑의 콩깍지가 벗겨지는데는 불과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그렇게 꽃피는 봄날부터 우리 연애도 시작되었고 한국은 처음 온 나를 데리고 전국 방방곡곡 가고 싶은데는 다 데리고 가주고 맛집도 찾아다니면서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다.

9남매 막내였던 남편은 늘 늙으신 어머님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곤 했었다. 당시만 해도 칠순도 넘으신 어머님께 여생을 그저 평범하게 행복하게 보내게 해드리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은 하곤 했다. 친정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셨던 나는 그의 마음씀씀이에 늘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 이런 남자면 내 평생을 의지 해도 될 것 같은 믿음에 그와 함께 하기를  약속했다.

하지만 결혼을 시작으로 남편의 사업이 기울기 시작했고 큰 아이가 태어나고 우리는 정말 혹독하리만치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중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 다 만류를 해도 당시 나는 그래도 그와 함께 이 힘든 고비를 넘기고 싶었다. 그에 대한 믿음으로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텼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펑펑 울어본 날도 수도 없이 많았다. 내가 선택했던 길 내가 선택했던 사람. 그 하나도 나는 버릴수 없었다. 긴긴 시간 홀로 자신과 싸움을 했었다. 그렇게 고비를 넘기고 둘째가 태어나고 셋째까지 우리에게 축복으로 찾아왔다. 무남독녀 외동딸이였던 나는 사실 아이는 딱 하나만 낳고 싶었는데 신은 나에게 축복을 주었나 보다. 늦은 나이에 좀 더 공부를 하고 싶었던 꿈을 안고 왔다가 덜컥 남편을 만나 물설고 낯설은 완도까지 오게 되었다.

사랑의 콩깍지가 단단히 쓰였다. 육지에서 태어 나 나이 스물이 넘도록 바다 한번 못보고 자랐던 나에게 바다는 환상 그 이상이었다. 모든 것이 신비롭고 재미도 있었다. 그런 나에게 섬머슴 남편은 더  멋있게 보였을 것이다.

2004년 6월에 결혼을 하고 남편 따라 완도에 정착을 하고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삶은 그다지 녹녹하지 않았다. 남편과 함께 바다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경험이 부족한 탓에 늘 실패를 하게 되었고 그렇게 이년을 하고 나니 바다가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한 번도 시골일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었던 나에게 모든 것이 두려움이 되었고 삶에 좌절을 느끼게 되었다. 친구도 없고 어디 이야기 할 사람도 없던 나는 오로지 인터넷이란 세상에서 내 삶의 외로움을 위로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어머님이 농사짓던 콩이나 녹두 등의 농산물이이 헐값에 상인들에게 팔려가는 걸 보고 인터넷에 팔게 되었다. 어머님이 직접 지으신 농산물이라 받으시는 분들도 국산임을 믿고 드실 수 있고 가격도 저렴하여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여 점점 고객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게 완도의 맛있는 미역 김 멸치 등을 좋은 상품을 선별하여 보내드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좋은 물건을 고를 줄 몰라 많은 어려움을 격었다. 많은 시행착오의 시간을 보내고 나니 좋은 상품을 고를 수 있게 되고 맛있는 상품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차츰 단골 고객이 늘고 상품을 믿고 꾸준히 시켜주시는 분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고 그걸 계기로 지금은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 중이고 여러 가지 도전을 하는 중이다.

2004년부터 지금까지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한국 아줌마들도 어렵다는 시집살이 나 역시나 쉽지는 않았고 언어의 차이 생활습관의 차이 이런 것들은 알게 모르게 고부사이 갈등이 되었다. 더구나 9남매 막둥이였던 남편인지라 시어머니와의 세대차이에서 오는 갈등에 막막한 적도 많았다. 그래도 남편 하나 믿고 아이들 크는 재미로 이런 저런 고달픔을 잊고 참고 인내하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눈이 펄펄 날리는 한겨울에 바다에서 꽁꽁 언 손을 불어가며 미역 작업을 하던 일, 시어머님의 악의 없는 말에 괜히 서러워 눈물 흘리며 고향 생각 하던 때를 돌이켜보면 어찌 그 시간을 다 지나 왔는지 스스로도 내 자신이 대견해진다.  

일만 하다 보니 애들은 잘 챙기지 못했지만 애들도 공부도 열심이고 상도 자주 타온다. 가끔은 나에게 칭찬을 해준다.‘토닥토닥’ 그 동안 용케도  잘 살아왔다고! 대견하다고. 또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완도가 너무 감사하다.  그리고 나의 반쪽도!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