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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축복인 건, 전세계 환자들과 소통하는 것

[리더스 칼럼]배민서 / 완도 출신. 미국 거주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7.01.26 07:45
  • 수정 2017.01.26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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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은의 시 '따뜻한 흙'을 묵상하며 엊그제 읽었던 이효석의 '모밀꽃 필 무렵(원제)'을 떠 올렸다. 왠지 '따뜻한 흙'과 '모밀꽃 필 무렵' 사이에 미묘한 시선의 응집력이 나를 끌어 당긴다.
이 십여년 전, 남편을 따라 미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에 누군가가 나에게 물었다.
"공부를 하실 예정이세요? 아니면 간호사로 다시 일을 하실건가요?"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싶은데요!"
영어도 못하던 나의 대답에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두 가지를 다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텐데요!"
 남편의 학교기숙사 아파트에서 네 살 짜리 딸과 칠 개월 된 아들을 데리고 시작하던 초창기 미국생활, 걸려오던 전화기 저쪽 편의 쏴라쌀라~ 알아듣지 못하던 영어에 나의 대답은 그저 "I can't speak English" 였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말했다. "여보야! 그렇게 영어를 무서워하다 애들이 커서 당신을 무시하면 어쩌려구 그래~"
지금 남편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발뺌을 하지만, 그 때 나에게는 커다란 충격일 수 밖에 없었다. 엄마밖에 모르는 사랑스러운 나의 아이들이 엄마의 무능함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것은 견딜수 없을거 같았다. 미국에만 오면 그냥 영어가 되고 오래 살게되면 영어가 술술 될거라 여기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수 십년을 살아도 공부하지 않으면 영어는 여전히 이방인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 3학년에 복학한 젊은 남자와 결혼을 했었다. 간호사로 일을 하며 두 아이를 낳았고 남편이 대학원을 마치는 동안, 나도 대학에 편입하여 가정학과를 졸업했었다. 그러던 내가 미국에서 언어때문에 발이 묶일 수는 없었다. 포대기에 어린아들을 들쳐업구서 그로서리에 가서 미국인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영어회화 교재를 사서 달달달 외우던 시절도 있었다. 동시통역까지 거침없이 하던 남편도 학교에서 공부하고 밤청소를 하면서도 귀에는 늘 공부할 것을 녹음해서 듣고 다녔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동안에 그저 집안에 안주할수 만은 없었던 가난했던 상황이 도리어 나를 키웠었다. 남편의 오랜 학업과 비지니스의 실패 역시 나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아이들을 대학으로 떠나 보낸 후, 지난 이 삼 년 동안에 나는 매 주 칼럼을 쓰기 시작했었고, 시작했던 공부를 무사히 마치고 또 다시 학위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15년째 일하고 있는 암 전문간호사라는 직업에 아주 흡족하며 감사하고 있다. 하루 12시간의 근무지만 낮 시간에만 일하고 한 주에 3일만 근무하는 것도 좋고, 충분한 보수와 일 년에 두 달 정도의 유급휴가도 맘에 든다. 어느덧 오랜 연륜으로 신경쓰지 않아도 들리는 영어도 감사하지만 가장 축복인 것은 전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환자들과의 긴밀한 소통들은 나를 성숙하게 만든다. 지난 번 아들이 살짝 귀뜸해 주던 한 마디...
"엄마! 누나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바로 엄마래요!"
MIT 공대를 졸업하고 보스톤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는 딸아이는 단 한 번도 나에게 그런말을 한 적이 없었다. 늘 엄마의 영어 악센트를 재밌다고 깔깔대며 웃었는데...
설은 다가오고 나이테는 차곡차곡 내 안을 채운다. 이제는 나무들처럼 오묘한 내면의 향기를 품어가야 하리라! 따뜻한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내 안에 씨앗처럼 간직된 떨쳐버릴 수 없었던 근원을 찾아 물길을 만들고 뿌리를 내려가야겠다. 오늘이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이란 것을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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