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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2

[나의 반쪽]박은실 독자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7.04.01 15:31
  • 수정 2017.04.01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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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호에 이어)
딸 셋 중 둘째인 나는 언니, 동생과 달리 요리에는 젬병이다. 인터넷을 뒤져서 어찌 흉내는 낼지언정 음식 만드는 것이 도통 즐겁지가 않다. 누군가 만들어준 음식을 맛있게 먹는 즐거움만 알 뿐. 그래도 신혼시절에는 집 밥을 지어 먹으려고 노력 했고, 종종 집에 손님을 초대해서 제법 근사한 밥상을 차려내기도 했다.

하지만 요리에 대한 흥은 이내 사그라들었고 머지않아 나의 실체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있는 반찬에 간소하게 먹자’며 반찬의 가짓수를 점점 줄여 나갔다. 요즘은 간소한 삶이 대세라지만, 시대를 너무나도 앞서나간 나의 미니멀라이프 식단에 그가 당혹스러워하기 시작했다. 결국 나의 약점은 남편에게 무기가 되고 말았다. 사소한 다툼이 있을 때마다 그는 다툼의 주제와 무관한 내 부족한 살림솜씨를 일발 장전했고, 그 총알이 마음 깊숙이 박힌 나는 서러움에 폭발했다.
그렇게 서로의 약점을 차곡차곡 갈무리해 두었다가 부부싸움을 할 때면 어김없이 시퍼렇게 날을 세워 격렬한 진검승부를 펼쳤다.

우리의 싸움은 첫 아이를 낳고 극에 달했다. 출산 후 나에게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바로 산후우울증이었다. 광주에서 제법 알아주는 사교육기관에서 일하던 나는 실력을 인정받아 동기들보다 일찍 승진을 했고, 입사 4년 만에 본사 연구실에 들어가 20년 근속한 선임들과 함께 교재 개발 일을 맡았다. 내가 만든 교재가 전국의 센터에 공급되었고, 각지의 원장과 교사들의 교육을 도맡아 했다.

그런 내 인생의 봄날에 임신을 하게 되었고, 아이의 탄생은 내 삶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세 돌이 될 때까지 밤새 7~8번을 깨어 울던 아이, 잠이 부족해 항상 피곤했던 나. 이 삶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불안감과 직장생활을 하며 인정받던 시절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은 괜한 걱정이 엄습했다.

아이를 데리고 동네 산책을 나갔다가 젊은 직장인 여성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괜히 그 앞에서 움츠러들었고, 뜻 없이 내뱉은 상대의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를 받았다. 나의 자존감은 깊은 구덩이 속에 묻혀 버렸다. 그런 나의 우울함은 남편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어떤 날엔 수다로, 어떤 날엔 넋두리로 퇴근한 남편 뒤를 쫓아 다니며 재잘대는 방법 말고는 우울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다른 아내들은 첫 아이 낳고도 잘 해내는데 왜 너만 유별스럽냐며 온갖 차가운 말로 내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폭언을 주고받는 복수의 날이 이어졌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차가워졌고, 그런 눈길마저도 뜸해질 때쯤 이건 아니다싶어 그와 나는 대화 시간을 늘려 보기로 했다. 부부상담 전문가들의 강의를 함께 시청도 했다.

그런데 그 강의를 보며 서로 다른 시각이 좁혀지지 않아 결국 더 크게 싸우고 말았다. ‘대화는 무슨. 그냥 이렇게 살지. 관두자, 관 둬.’ 몇 차례의 노력도 물거품이 되던 중에 마을에서 이루어지는 생활협동조합에 우연히 참여하게 되었다.

난 여태 내 일, 내 가족에만 몰두하며 살아왔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많이 놀랐다. 안전한 먹거리, 공정무역, 윤리적 소비, 마을 공동체...아주 낯선 세계 안에 발을 들여 놓았고 그 속에서 건강한 이웃들을 만나며 내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당장 눈앞에 놓인 걱정들로 스트레스 받는 일들도 크게 줄어들자 내 변화하는 모습에 남편도 나의 활동을 지지해 주었다. 광주를 떠나올 때 같이 활동하던 이웃들과의 작별이 가장 아쉬웠다. 완도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고맙게도 대안장터 ‘장보고웃장’의 운영진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이곳에서도 남편은 나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이제 와 생각하면 나는 변화하지 않으면서 남편은 변하길 바랐던 것이 얼마나 큰 욕심이고 꿈에 불과했는지 알 것 같다. 그렇게 함께 조금씩 노력해서 주 2~3회 벌어지던 격전이 이제는 6개월에 한 번, 1년에 한 번으로 줄었다.

요즘 밤늦게까지 야근을 이어가는 남편을 보면 마음이 찡하다. 하지만 오히려 일하고, 애들까지 보느라 고생 많다며 내 걱정을 더 많이 한다. 그도 나도 이제는 안다. 완벽하지 않지만 서로가 얼마나 애쓰며 살아가는지를 말이다. 다음 달에 우리 부부는 결혼 10주년을 맞이하지만 여전히 주머니는 가볍고 일 하느라 바빠서 가족여행은 계획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흔들리지 않고 함께 걸어갈 나의 남편과 두 딸이 있어서 든든하고 행복하다.

#본 코너는 현대사회에 더욱 상실해가는 가족애를 회복하고 감동의 부부애를 위해 기획되었다. 미미르의 샘 박은실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독자 여러분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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