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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자유이므로"

[이사람]김성률 전교조 완도군지회장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17.04.01 15:45
  • 수정 2017.04.01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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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자유로운 영혼이길 바랬죠
모든 일이 그에게는 기적과 같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바라보는 바다와 나무, 꽃과 새를 보며 그는 놀란다.
그리고 소리친다.
“이 기적은 도대체 무엇이지요? 이 신비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생동하는 저 푸른바다와 한 뼘은 더 커진 나무는 나의 눈을 이토록 놀랍게 한답니까?"
"저 우아하게 피어난 꽃을, 그리고 저 감미롭게 속삭이는 산새 소리를 어떻게하면 사랑하는 그녀에게로 가져다 줄까요?"
그는 마치 그리스인 조르바 같았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땅끝 인근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나이는 쉰셋(척 보기엔 스물 셋 청년같은),
직함의 이름만 들어선 완전 강성일 것 같은 전교조 완도군 지회장. 하지만 너무나 유쾌하고 너무나 자유로운 남자.
완도고 김성률 교사(사진).
"교직을 복으로 알고 살고 있습죠.. 같이 배우고, 같이 나누며, 때론 싸우고, 때론 설득 당하며..."
"이런 게 학생들을 위하는 활동이고 나의 삶이기를 바랍니다"
가족은 부부가 완도에서 삶을 가꿔가며 완도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춰 나가자고 늘 벼르면서 살고 있단다.
교편을 잡게 된 사연을 묻자, 그가 말했다. "초등 2학년 무렵부터 문학의 삶을 살고 싶었어요. 스스로 자유로운 영혼이길 바랬죠."
"그런데 부모님이 강력하게 사범대엘 가길 원했고, 그리해 그 길을 걷게 됐고, 그러다 민주화의 물결을 탔게 됐으며 대학 졸업 후, 십 수 년 동안 미발령으로 지내다가 30대 후반에 ‘시국사건 관련자 특별법’으로 교단에 들어서게 됐습니다."

장사를 다섯번이나 망쳐 먹었죠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절을 묻자, 잠시 그 시절의 감회에 젖는지 말을 잇지 못하는 김 교사.
"대학을 마치고 군 제대 후 할 수 있는 일을 찾지 못했습니다"
"취업도 할 수가 없었죠"
"장사를 5번이나 망쳐 먹고, 막노동으로 전전했지요"
"그 때가 30대였습니다"
"가장 어려웠고, 또 세상으로부터 가장 많은 배움을 얻은 시기였죠. 공짜로 배운다는 건 결코 없다는 걸 깊이 새겼습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운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김성률이 있게 됐고, 돌이켜보면 참 고마운 시절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가장 고마웠던 사람은 누구였냐고 묻자, 그는 30대 후반 처음 교단엘 들어왔을 때 자신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 준 한 선배라고 했다. 그 선배 또한 다른 일을 하다가 어렵게 교단에 들어왔는데, 그때는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기가 너무 어려워‘교사 자격이 부족해 그만 두어야겠다’는 김 교사를 친형님처럼 살펴줬다고.
그러며 "그 선배가 아니었으면 저의 교사 생활이 시작하자마자 사라졌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은 저의 생각을 벗어나 있었고, 공동체를 추구하던 제게 동료교사들은 너무 멀리 있었죠"
"그 시기를 버티고 공부하게 해준 선배, 늘 생각나는데 그만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습니다"
전교조 활동과 교육 자치에 대한 소회를 묻자, 김성률 교사는 말했다. "사범대를 다닐 때, 참교육의 열망으로 늘 목말랐었죠. 아이들의 삶이 들썩이고 교사와 학생들이 꿈을 꿀 수 있는 학교, 소수를 위한 교육이 아닌 모두가 협력하는 교육, 차별을 넘어 공정한 사회를 함께 준비하는 과정으로서의 참교육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생일 때부터 참교육운동에 뛰어들었고, 발령과 동시에 주저없이 전교조에 가입했죠. ‘전교조는 큰 강물을 만드는 샘이다’라고 당당히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전교조의 길 중에 큰 가닥의 하나가 교육 자치, 학교 자치입니다. 교육은 권력자에 의해 휘둘려서는 안 되죠. 아이들의 미래와 사회의 미래가 일개 독재자에 의해 결정될 수는 없지 않겠어요?"

우리의 아이들, 이 말에 누구도!!!
지역 청소년에 대해 말해 달라고 하자, 그가 말하길 "완도는 변방이고 섬입니다. 오랜 섬의 기억이 소통의 장애물로 자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죠. 때로는 뭍에 대한 갈증이 섬사람의 가슴에 문신처럼 새겨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 원치 않았던 문신은 '촌놈'의 굴레가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 촌놈의 삶에 완도를 넘어 세상을 건너는 바람도 있음을 보여주는 아이들이기를 바랍니다. 완도의 청소년들, 참 멋진 청춘들이죠"
지역사회에 하고픈 이야기는 완도군과 시민사회가 좀 더 청소년들과 가까워지고 그 역할을 확대해 나갔으면 한다고 했다.
그러며‘우리 아이들’이라고 강조하며 이 말로부터 어느 누구도 자유로워서는 안 된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삶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대로 춤추듯 살아낼 뿐이다.
자연의 일부로서, 본능적으로, 그래서 더 지혜로울 수 있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의 자유는 땅 속에 깊이 뿌리 내린 본능적 각성이며 흔들림 없는 깨달음이다.
그 삶 속에 거짓이란 없다. 고통과 슬픔이 찾아오면 미치지 않기 위해 춤을 추고, 기쁠 땐 옴 몸으로 기쁨을 표현한다. 바로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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