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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첫사랑, 통영 처녀 박경련

[에세이-詩를 말하다]김인석 / 시인. 완도출신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7.04.14 13:01
  • 수정 2017.04.14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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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 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의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부분

 

김인석 / 시인. 완도출신

백석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 심금이 울려온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비롯하여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흰 바람벽이 있어」 이만큼 애절한 시가 또 있을까?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위의 작품에서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고 시인은 화자를 내세워 시골의 정서와 더불어 어머니의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다. 차디찬 물에 무와 배추를 씻고 있는 모습은 서럽도록 안타까운 마음이 배어나오게 한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오랜 기간 타향이란 공간을 소유하고 살아가다 보면 고향과 부모를 더욱 깊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사랑했던 사람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어 여기저기 시린 마음으로 만져보기 마련이다.

백석 시인 역시 어머니를 무척이나 그리워했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사랑했던 첫사랑, 박경련에 대한 깊은 그리움도 작품 속에서 늦가을 단풍잎보다 더 붉게 붉어져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렇다.

그는 그녀와의 이별로 인해 그의 내면의 그리움을 지우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지우지 못한 채, 그의 영혼은 대구국 냄새가 풀풀 나는 통영 앞바다에 머물러 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사랑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의 그리운 마음은 통영 앞 바다 깊이보다 더 깊고 더 푸르다는······

그의 처절한 핏물 울음이 이 몇 줄의 詩行 속에 구절구절 담겨져 하나의 봉우리로 아픔이 되어 밀려오는 듯하다.

청마 유치환이 이영도를 사랑했던 것처럼, 김우진과 윤심덕의 현해탄 사랑처럼 말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는 그의 서러움 같은 슬픔 속에서 무엇 하나 소유한 것도 없지만 비록 비대칭적인 사랑이었지만, 가슴 속에 꼭꼭 묻어두고 꺼내어보고 싶을 때 꺼내어 보는, 참 멋진 가을 같은 사랑. 사랑이란 때로는 살아 있는 죽음이고, 때로는 벽이 없는 그리움의 공간에 홀로 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프고 그립고 아련해서 보고 싶고 흘린 눈물은 그리움의 동력이 되고 기억 저편에 통영이 있고, 조약도 같은 섬도 있다. 어쩌면 백석은 5시에 떠나는 한 여인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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