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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8일 이충무공 탄신

[에세이-고금도에서]배준현 / 고금주조장 대표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7.04.29 14:33
  • 수정 2017.04.29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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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2월 17일, 통제사 이순신은 고금도 덕동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한다. 백성들은 스스로 나라를 지키고자 의병을 만들고 이순신장군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해 7월,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 5천명이 고금도진에 합류한다. 조명연합군이 결성된다. 고금도 역사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북적였다. 수만명이 농토를 만들어 식량을 확보하고 화염을 만들고 군선과 대포같은 무기를 만들었다.

그해 8월, 이순신장군과 진린이 연회를 하려는 데 왜군 함대가 습격하려 한다는 보고를 받는다. 이순신장군이 직접 수군을 이끌고 적중으로 돌격해 적선 50여척을 대파한다. 이순신장군의 유명한 해전들 속에 묻혀있는 고금도 해전, 짧은 기록으로 사료에 남아 있지만 그 의미는 매우 크다.

고금도해전이 있고 나서 장흥, 고흥에 출몰하던 왜군들이 순천방면으로 도망한다. 왜군은 본국으로 돌아가려 순천왜성에서 퇴로를 찾고 있었고 마침내 노량해전에서 조명연합군은 왜군을 섬멸함으로써 7년전쟁이 끝난다. 하지만 조선민중은 영웅을 잃었다. 이순신장군의 유해는 본영인 고금도에 임시 안치하여(지금 월송대 자리) 이듬해에 아산으로 옮겨진다.
한편, 진린은 관우사당(지금 충무사 자리)을 고금도 사람들에게 부탁한다.

훗날 통제영이 있던 자리엔 첨사진이 설치되고 1895년(고종 32) 군제 개혁으로 폐진되기 까지 200여년간 해상방어의 요충지로 관리된다. 관우를 모신 사당은 이순신장군과 진린을 같이 배향하다가 정조임금이 치제문과 탄보묘란 현판을 손수 내린다. 일제강점기에 잠시 제향이 끊겼다가 해방이 되고 충무사로 이름을 고치고 정전에 이충무공을 모시게 된다.

이렇듯 고금도는 이순신장군의 얼이 담겨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임진왜란 후 동아시아 3국은 많은 변화를 겪는다. 조선과 명은 청나라에게 패권을 넘겨주게 된다. 명이 망하자 진린의 후손은 고금도에서 조상의 발자취를 찾다가 아예 해남땅에 정착했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바꿔놓았다. 섬나라 일본은 무시못할 세력임을 확실하게 알렸고 그로부터 300년이 지나지 않아 동아시아를 거머쥔다. 한.중.일, 세나라는 애증관계를 함께 했다. 임진왜란때엔 조선과 명이 연합군을 결성하고 일본이 하고자 했던 대륙진출야망을 접게 했다. 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 명, 왜 세나라가 만났다. 고금도해전이다. 

동아시아의 미래를 함께 하는 파트너로 지난 역사를 알고 앞으로 한중일 관계를 전망해 본다.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가를 지난 역사가 가르쳐 준다. 역사현장에서 교훈을 얻는다. 고금도충무사가 그런 곳이다. 한.중.일 관광객들이 임진왜란을 마무리 지은 이곳을 찾고 함께 살아갈 길을 찾는 것은 매우 뜻있는 일이다.

요즘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일들. 북한이 핵을 개발하고 미국은 사드를 배치하고 중국은 경제보복을 한다. 일본의 자위대는 엄청난 군사력으로 그들이 지난 날 벌였던 제국주의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강대국사이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우리는 시대를 달리해 되풀이 되는 역사를 살고 있다. 

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탄신일이다. 해방 후 지역유림을 중심으로 모인 고금도충무사보존위원회(위원장 정충갑)는 해마다 탄신제(양력4.28)와 순국제(음력11.19)를 정성껏 지내고 있다. 올해부터 탄신제는 한층 격을 올려 군단위 행사로 치루기로 했다. 충무사보존위원회는 기념관건립, 중국 관광객을 겨냥한 관왕묘 복원들을 추진하고 있다. 올해 11월, 신지와 고금을 잇는 장보고대교가 개통되면 훨씬 많은 관광객들이 충무사를 찾을 것이다. 관광기반시설을 확충하고 국가사적지다운 면모를 갖춰야 한다.
 

배준현 / 고금주조장 대표

 성웅 이순신장군의 넋이 바다를 굽어보고 있는 고즈넉한 충무사에서 충무공과 함께 했던 우리수군들과 백성들을 상상하면서 고개를 숙인다.

 필자주>  (고금도해전과 관련된 이야기는 1657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에 전한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공이 고금도에 이르렀을 때는 군의 위세도 장했거니와 섬 안의 민가만도 수만호에 달해 한산도 시절의 열 배나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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