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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막둥이를 안 낳았더라면 뭔 재미로 살아쓰까잉

[에세이-고향생각]배민서 / 완도 출신. 미국 거주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7.04.29 14:42
  • 수정 2017.04.29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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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민서 / 완도 출신. 미국 거주

 나는 완도읍에서 바라다 보이는 크고 작은 다정한 섬들과 에메랄드 빛으로 출렁이는 바다가 사무치도록 그리워 가슴이 저려올 때가 종종 있다. 어쩌면, 내게 있어서 고향은 나를 지극히 사랑해주셨던 엄마의 애달픈 숨결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품은 늘 따스하고 포근했었지.

엄마나이 마흔 세살, 예기치 못했던 파산으로 집도 재산도 다 잃고 가장 힘드셨을 부모님의 인생길에서 나는 태어났었다. 이미 일곱명의 아이들이 있었으며 그들을 제대로 뒷바라지도 못하던 막막한 상황이신지라, 그저 하늘의 뜻에 순응하듯 막내로 낳으셨다고 하셨다. 
"우리 막둥이 안 낳았더라면 먼 재미로 살아쓰까잉~"

부모님은 내게 큰 것을 기대하지 않으셨다. 공부를 못해도 느려터져 잘하는 것이 없어도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 만으로도 그들의 기쁨이 되었었나 보다! "우리 민서는 참 잘 할거야~" 그 말 한 마디가 내게 귀한 알곡으로 떨어져 자존감을 키워준 것은 아니었을까? 아낌없이 주셨던 사랑이었기에 내가 힘들 때면 더 생각났었고 행여 잊혀질까 늘 되새김질하며 인생길을 걸어왔었다.

따스한 사랑의 말 한마디는 사람의 인생을 바꿀만큼 위대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라는 우리의 속담이 있다. 이렇게 언어를 구사하며 대화하는 사람은 진정 부요하고 행복한 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처럼 생명력있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마음 깊은 곳으로 부터 진정한 사랑과 배려가 흘러 나와 상대를 감동시킬 때 만이 가능할 것이다.

홀로서기를 시작한 후에 나는 수 없이 많은 직업들을 경험해 보았었다. 미역공장을 시작으로 요식업협회 경리, 주식회사 기린 빵 공장, 식당 종업원, 포장마차, 파출부, 우뭇가사리로 묵을 만들어 가게에 대주는 일, 신경외과 중환자실 간호사, 부산 빈민지역 일차보건사업, 옷 장사 ..., 그리고 미국에 와서도 도넛샆 종업원, 뷰티 써플라이 종업원, 세탁소 종업원, 남편 비지니스였던 드레스 샾, 암병동 간호사, SAT과외 카운셀러 등 다양한 경험들 중에 가장 힘들고 스트레스가 많은 일이 바로 지금 내가 하고있는 카운티병원의 항암치료 간호사라고 생각한다.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기에 타성에 젖을 수도 없고 매 번 첼린지를 주는 이 직업을 나는 많이 사랑하고 있다.

얼마전에 항암치료 모든 싸이클을 마치고 퇴원했던 환자가 정기검진을 받으러 왔다가 우리병동에 들러 일하고 있던 나를 불렀다. "My angel~!" 이것은 내가 그녀에게 붙여준 닉네임 이었다. 반가움에 빅 허그를 나누고 그녀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으며 더 이상 정서불안과 불면증도 사라졌다고... 그리고 새로운 삶을 얻은 기쁨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새로 자라기 시작한 머리카락과 탄력있는 얼굴, 그녀의 눈가에는 연신 감사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지난 토요일에도 CNS Lymphoma로 진단받은 젊은청년이 암덩어리가 커지면서 갑자기 시력을 잃고 통증을 호소하며 흐느끼고 있었다. 진통제를 준 후 그의 곁에 앉아 손을 꼬옥 잡아주며 나는 최선의 한 마디를 찾고 있었다. 어떻게 그를 도와줄 수 있을까? 이렇게 한 마디의 언어로 기적을 만드는 일은 어쩌면 나에게 주어진 사명일지도 모른다. 가장 힘든 순간을 맞이한 나의 환자들에게 따스하게 가슴을 녹여주는 말, 그 한 마디를 위해 나는 오늘도 간절히 나의 두손을 모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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