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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한 내맡김, 가리포 길을 걷다

[특별기고]가리포 첨사 이순신을 그리며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7.04.29 14:57
  • 수정 2017.04.29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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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서 나오는 생각은 지혜를 이루고 문자에서 나오는 사유는 지식을 이룬다. 몸에서 나오는 생각의 크기가 마음(摩音)이나 마력(磨力)이나 마하(摩訶)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공부이고 그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것이 바로 생각력이다.

도를 얻는다는 것의 실체가 깨달음인데 깨달음은 생각력의 확대라는 것. 사는 이유가 생각력을 길러 지각을 포함하기위한 것이다.

지각은 문자를 근원으로 한다는 것, 하여 가장 쉬운 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라고 하지만 만약, 생각력이 지각력에서 억제되면 불만포인트를 축적한다. 이 불만 포인트가 누적되면 병(病)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지각력에 대항한다. 그래도 머리가 고집을 부리고 지각력을 고수하면 몸은 대항하기를 멈추고 자멸의 길을 걷는다.
그게 병이 깊어지고 사망에 이르는 첨단길이다
몸이 근원인 생각력을 키우는 것. 그게 복음의 원리다.

우리 완도를 이르는 말엔 총 3개가 있다. 장보고에 의해 널리 알려진 청해진과 더불어 우리가 현재 주소지로 쓰고 있는 완도. 그리고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가리포진(加里浦鎭)으로 지난 일요일, 그 가리포진의 옛길을 싸목싸목 걸었다.

남쪽 바다 파도만 넘실대는데
외로운 성 비스듬히 걸려 있도다
돛단배 저 너머는 해가 뜨는 곳
한 잔 술 드노라니 신기루(蜃氣樓) 나타나네

장유(張維) 선생의 '가리포'를 떠올리면서...

가리포. 현재까지 가리포(加里浦)라는 이름은 정확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물론 가리포라는 한자어는 있지만, 한글이 변형됐다는 게 일반론이다. 현재 향토사학계에서 추정하고 있는 설 중엔, '가리'는 우리말의 곡식이나 땔나무 등을 쌓은 더미에서 왔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그러면 '가리'는 어디인가?란 의문에는 완도읍에 아름다운 구슬처럼 떠 있는 주도일 가능성을 높다.

당시 사람들은 완도항 앞바다의 사철 난대상록활엽수림으로 덮여있는 아름다운 섬을 보고 볏단이나 보릿단 또는 곡식가마니 등을 높다랗게 쌓아놓은 '노적가리'를 상상했을 것이다. 가리포가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은 1521년 조선 중종 16년에 완도에 수군 진을 설치하여 왜구의 노략질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 왕국을 지키고자 당시 완도항의 이름이었던 '가리포(加里浦)'에 수군 진을 설치하고 가리포진이라 하였다.

이듬해에 제1대 가리포진 첨사 이빈이 부임했다. 임진왜란에 활약했던 이응표(1593. 9월 취임)와 노량해전에서 순국하며 이순신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이영남(충무사 배향), 또 이순신 장군과 함께했던 변홍달, 조계종, 최강, 위대기 등.
여기에 한민족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 이순신은 당시 종 4품 진도군수로 발령받기 전, 가리포 수군첨사로 임명되고 부임도 하기 전에, 또 다시 가리포 수군첨사로 임명되었다가 전라좌수사로 파격 승진하게 된다.

또 가리포에 근무했던 신궁 이봉학을 빼놓을 수 없다. 벽초 홍명희가 쓴 임꺽정에서 그의 의형제로 나왔던 이봉학. 쏘았다하면 백발백중, 엑스텐을 맞추는 최고의 신궁. 참새의 눈을 맞춰 관군으로 특채 될 만큼 비범한 활솜씨를 선보였던 이봉학은 이곳 가리포에서 근무하며 을미왜변 당시 맹활약을 펼치며 조정에서 종 6품인 병절교위 직책을 부여 받았다. 거기에 고종실록에 나타난 가리포 거북선까지. 이 생각 저 생각에 이곳 저곳을 살피다보니 아침 9시에 내딛은 발걸음이 점심 때가 가까워져간다.

그 시간이 마치 일엽편주처럼 흘렀다. 그래 삶이란 이런 것이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는 시간... 아, 마음이 정화된다는 게 이런 것인가 보다! 삶이란 역시 어떤 다른 목적의 수단일 수는 없는 것 같다.

이서 / 완도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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