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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청징한 관음사 빗대 이재의를 놀리다

[관음사 특집]범해선사·정약용 등 다수 명사들 찾았던 완도 명소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7.05.29 08:33
  • 수정 2017.05.31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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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암 터(관음사지)와 불단이 위치한 도치바위.

상왕봉 관음암(觀音庵).
이곳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도발이 아주 잘 듣는 곳이다.
그래서 선법을 닦은 스님들 보다는 일반 대중이 많이 찾았던 곳.

관음(觀音)이란 불교에서 나온 말로 구원을 요청하는 중생의 근기에 맞는 모습으로 나타나 대자비심을 베푸는 보살이다. 불가에선 중생이 관세음보살의 명호을 부르면, 곧바로 그 소리를 듣고서 그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노력을 기울인다고 한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관음암는 상왕봉 중턱에 자리해 완도읍과 주도가 한눈에 들어올 만큼 빼어난 절경에 자리하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골짜기를 가득 채우고 있는 동백나무 숲이 멋진 풍경으로 다가온다. 양탄자 같이 아름다운 동백나무 숲 위로 흰 구름이 뭉실뭉실 오르내린다면 더 이상의 절묘한 풍경이 없다.

관음암(관음사지)를 올라가기 전에 우측으로 보이는 것은 상여바위다. 상여바위는 다소 가팔라서 매달린 줄을 잡고 오를 수 있는데 올라가 보면 역시 장도 쪽 풍경이 더 뚜렷하고 아름답다.
 

완도관음사목조여래좌상

관음암과 관련한 역사적 유물과 기록도 꽤 있다. 먼저 유물은 목조여래좌상이 전해진다.  관음암에 봉안되었던 불상으로  ‘완도관음사목조여래좌상’이라고 이름 지어져 전남대학교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이 불상의 내부에서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비롯한 다수의 복장유물,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 등이 함께 발견됐다. 복장물 자료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완도관음사목조여래좌상’의 조성시기는 1569년(선조 2년)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관음암의 창건시기는 조선 중기나 중기 이전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문헌 기록으로는 청허 휴정(서산대사)의 직계 제자인 운담 희영이 잠시 기거했다는 이야기와 대흥사 범해선사 문집의 ‘관음암’ ‘관음암 산신각 창건기’, 관음암이 완도 유일의 관내 암자로 그려져 있는 1899년 발행된 완도읍지 등이 있다.
 

1899년 제작된 완도읍지에는 '관음암'이 완도 유일의 관내 암자로 그려져 있다.

특히, 강진 다산 초당의 정약용이 보수논객과 벌인 사단칠정 논쟁에서 관음암을 언급한 편지는 다산 정약용도 완도 관음암을 알고 있었으며, 왔다 갔던 것을 내용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 편지의 내용이 자못 흥미롭다.

24세 때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백련사의 아암 혜장선사와 교류를 했던 정약용은 문산 이재의와 조선 최고의 논쟁 중 하나인 고봉 기대승과 퇴계 이황의 사단칠정 논쟁과 관련해 다시 편지를 통해 논쟁했다.
 

관음암 터에서 바라본 완도항 전경.

 편지에서 정약용은 이재의를 다소 조롱하듯 “노형께서는 많은 사람 사이에 앉아 날마다 소란하고 시끄럽게 지내시다가, 이따금 간혹 한가한 틈을 타 대충 보시기 때문에, 제 글을 보실 때도 심각하게 종합하여 분석하지 못하는 듯합니다.”“주신 글의 내용이 제 말과 서로 합치되는데도 결론에서는 마치 이론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셨더군요. 또 혹 제 주장은 애초에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주신 편지에서는 한층 더 극단적으로 나가기도 했으니, 이것은 모두 소란스런 중에 생긴 일입니다.”“지금 크게 바라는 것은 반드시 우리 두 사람이 앞에는 푸른 바다가 임해 있고 뒤에는 솔바람이 불어오는 완도의 관음굴로 함께 들어가 보고 듣는 것을 거두고 티끌세상을 훌훌 벗어나, 마음속에서 환한 빛이 나오게끔 하는 것입니다.”라고 전했다.


다산 정약용은 선비라면 의당 고결한 인격으로 학문에 힘쓰는 자인데, 당신은 날마다 음주가무로 지내니, 눈과 귀가 흐려진 것이 아니냐? 그러니 우리 솔바람 솔솔부는 청징(淸澄)한 관음암에 올라 세속의 때를 벗자고 할만큼 선비라면 한 번쯤 가봐야 할 명소로 관음사를 예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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