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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지 시대 아픔 부둥켜 안은 불꽃 청년

[완도 근현대사 인물열전 5]광주학생운동의 전국화에 기여한 <장석천 선생>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7.05.29 11:30
  • 수정 2017.05.29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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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천 선생(1903~1935)은 일제강점기 당시 전남청년연맹 상무집행위원장으로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학생투쟁지도본부를 결성했다. 광주학생운동의 불길을 우리 독립운동의 일대 전환기로 만들고자 신간회와 협력하여 운동을 경성과 전국에 확산시킨 인물이다.

신지도 지주의 아들,  서울 중앙고보  재학 중 차별·인격적 모멸감 반일의식이 일본인 교사 배척으로 나타나
장석천 선생은 완도군 신지면 송곡리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장인오는 신지도에서 손꼽히는 지주였다. 선생은 완도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뒤, 1918년경 서울로 올라가 중앙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였다. 중앙고보에 다니면서 식민지인으로 받아야만 하는 차별과 인격적 모멸감에 반일 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반일 의식은 일본인 교사에 대한 배척으로 나타났다. 중앙고보에 ‘호랑이’라고 불린 일본인 체육 교사가 있었는데, 그는 수업시간에 학생들을 아무런 이유 없이 괴롭히곤 하였다. 이에 분함을 참지 못한 선생은 그 교사를 응징하였다. 이후 선생은 더 이상 중앙고보를 다니지 못하게 되었지만, 다행히 보성고보로 전학하게 되어 1923년 3월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보성고보를 졸업한 선생은 관립 수원고등농림학교(이하 수원고농)로 진학하였다. 이후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입학했으나, 1926년 6월경 ‘동맹휴학’으로 인해 무기정학 처분을 당하자 수원고농을 스스로 중퇴하였다. 그 뒤 선생은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상과대학에 입학하였지만, 4개월이 지난 1926년 10월경 학업을 중단하고 전남 광주로 돌아왔다. 일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보성고보 졸업 후 도쿄 유학 갔다가 광주서 사회운동 시작, 광주학생운동  비밀결사 학생조직 '성진회' 지도
선생은 광주청년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학생운동단체인 성진회를 지원하였고, 1927년에는 광주청년동맹, 전라청년연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신간회 광주지회에 참여했으며, 1928년 12월에 신간회 광주지회의 상무간사로 활동했다. 1928년 여름 강해석, 김재명, 지용수 등 광주청년동맹 맹원 가운데 조선공산당 참여자들이 대거 검거된 뒤 선생은 광주청년운동을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지도자가 되었다.

1929년 11월 3일 제1차 광주학생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당시는 며칠 전 일어난 ‘나주역 사건’으로 광주지역 한일 학생들 간의 집단적인 충돌로 치닫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날은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명치절 행사와 더불어 전남지역 누에고치 증산[産繭] 6만석 돌파 축하식이 거행되던 날이었다.

광주고보생들은 명치절 기념식에 참석한 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귀가하는 길에 일본인 중학생들과 맞닥뜨렸다. 격앙되어 있던 광주고보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 간에 격투가 벌어졌고, 이때 일본인 학생이 휘두른 단도에 광주고보 학생들이 부상을 당하였다. 그 뒤 한일 학생들 간의 충돌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양 측의 학교 교사들이 나서고 경찰들이 출동하면서 해산되었다.
 

광주지역 학생비밀단체 ‘성진회’ 조직 기념사진(1926). 성진회는 1929년 6월 독서회로 발전하면서, 학생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게 된다. 당시 정석천 선생이 독서회 결성을 적극 후원했다.

신사참배 거부 후 귀가하던 광주고보생들과 일본학생 충돌 광주학생운동, 학생투쟁지도본부 만들고 신간회와 협력
학교로 돌아간 학생들은 선후책을 논의하였고, 그 자리에 참석한 전남청년연맹 학생부 책임자 장재성은 독서회 학생들을 통해 시위운동을 지도하였다. 광주고보·광주농교 학생들은 교가와 운동가를 부르며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장작·곤봉·배트 등으로 무장한 시위대는 광주중학교를 습격하고자 했지만, 일본 경찰과 소방대의 강력한 저지에 무산되자 시위행진을 벌인 뒤에 해산하였다.

경찰 당국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주동학생에 대한 대규모 검거에 착수하여 70여 명의 조선인 학생 중 60여 명을 검사국에 송치하였다. 이러한 대규모 검거 선풍은 한일학생뿐만 아니라 광주지역 사회단체 인사들을 자극하여 제2차 시위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남청년연맹 상임집행위원장이던 선생은 1929년 11월 4ㆍ5일에 걸쳐 각계 사회단체 책임자들을 불러 모은 뒤에 대책을 협의하였다. 이때 장재성은 검거된 학생들의 석방을 위해 시위운동을 제안하였고 참석자들이 모두 이에 찬성하여 제2차 시위계획이 추진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인 학생시위로 확산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투쟁을 효과적으로 지도하기 위한 ‘학생투쟁지도본부’를 만들고 각기 업무를 분담하여 계획을 차질 없이 진행시키기로 하였다. 전국적 시위운동을 주도하게 된 선생은 광주 및 전조선의 학생 지도를 전담키로 하였다.

한편, 신간회 광주지회 상무간사를 겸임하고 있던 선생은 전문을 통해 신간회 본부에 광주학생 시위운동의 소식을 전했다. 신간회는 광주·송정·장성 지회에 광주사건의 진상을 파악하여 보고하라는 지시를 하는 한편, 집행위원장 허헌을 책임자로 하여 광주로 파견하였다. 선생은 신간회 나주지회 위원장인 김창용 등과 함께 이들을 맞아 광주사건의 진상을 보고하였다.

이때 선생은 허헌과 대책을 협의하는 가운데 시위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것이라는 계획을 알렸고, 허헌으로부터 신간회 차원에서 이에 적극 협조할 것이며 필요한 경비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러한 논의는 이전에 조선청년총동맹에서 파견된 부건·권유근 등과도 논의하였던 문제였다. 선생은 그들과 함께 시위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를 한 뒤에, 장성청년동맹 집행위원 강영석으로 하여금 권유근과 함께 상경하여 거사를 준비토록 하였다. 한편, 장재성은 제2차 시위운동을 위해 학생들에게 배부할 전단을 작성하고, 각 학교 독서회 관련 학생들을 불러 모은 뒤에 앞으로의 계획을 알리며 이에 적극 동참할 것을 제안했다. 학생들은 이에 적극 찬성을 표하는 한편, 임시휴업이 끝나는 11월 11일에 수업시작 시간을 기하여 세 학교가 일제히 선전 전단을 살포하고 시위운동을 감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선생은 나름대로 완도 출신의 고보 5학년생인 김향남을 통해 학생들의 동향을 살피는 한편, 11월 10일 밤 광주고보생 6명을 규합하여 시위운동에 대해 논의하던 중, 장재성이 거사일을 11일로 잡았다는 사실을 알고 12일로 날짜를 변경토록 하였다.

11일은 임시휴업이 끝나고 첫 등교하는 날이기 때문에 학생들의 등교여부를 확인하기 어렵고, 또한 12일이 장날이기 때문에 시위운동을 벌이기에 적당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작업의 준비를 위해 강영석이 권유근을 따라 서울로 올라갔다. 이어서 신간회 본부의 집행위원장 허헌 등이 광주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내려왔다. 선생은 나주 신간회 지회장인 김창용 등과 함께 허현을 만나 광주학생사건의 진상을 보고하고,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것을 역시 제의했다. 허헌도 이에 찬성했다.

11월 12일 아침, 농업학교의 교실에서 격문 전단이 배포되면서 시위가 촉발됐다. 광주고보에서는 선생의 지시를 받은 김향남이 5학년을 반교실에서 학생들을 독려하면서 시위운동이 개시됐다. 이에 광주고보와 농업학교는 곧바로 임시휴교에 들어갔지만, 13일에 광주여고보, 전남사범학교로 시위운동이 확산되어 갔다. 일본 경찰들은 즉각 학생들 검거에 나섰고 시위운동의 배후세력을 캐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 결과 광주형무소에 시위운동 가담자 2백여 명이 수감될 정도로 탄압이 혹독했다.

3.1운동 이후 최대규모 항일운동 '광주학생운동' 전국으로 확산시키고 시위주동혐의로 체포·옥고
광주에서의 제2차 시위운동은 일제의 보도통제로 인해 밖으로 알려지지 못했다. 이는 오히려 광주에서 “조선인 여학생 2명이 코를 일본 군인에게 절단 당하고 한인 남학생 12명이 피살되었다”는 풍문이 나돌면서 세상을 더욱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런 가운데 선생이 경성으로 올라가 학생들의 시위가 필요하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선생은 휘문, 보성, 경신, 배재, 경성제2고보, 중동의 학생들을 만나 시위운동 참여를 권유했다. 황태성도 경성제2고보, 중앙, 보성, 휘문 학생들을 만났다. 12월 2일 계획에 맞춰 시내 각 중등학교에 격문이 살포됐다.

그 뒤 12월 3일부터 시위를 주동했던 인사들이 일제에 피체되기 시작하였고, 12월 5일에 선생과 차재정 등 10여 명도 피체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시위운동 자체가 위기를 맞기도 하였지만, 12월 5일 경성제2고보에서 가장 먼저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경성제2고보는 학내문제로 동맹휴학이 계획되어 있었는데, 선생 등의 적극적인 권유에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는 시위로 발전시키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 뒤 시위운동은 각 학교로 번져나갔고, 12월 9일에 이르러서는 연합시위로 발전해 갔다. 서울지역 시위운동은 16일까지 계속됐고 모두 30개교의 남녀 전문학교와 중등학교를 비롯하여 각종학교, 보통학교에서 1만 2천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 또는 맹휴를 전개하였고, 그 결과 1천4백여 명의 학생들이 검거됐다.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항일시위는 선생 등의 이 같은 전국화 노력의 결실로 이듬해인 1930년 3월까지 이어졌다. 전국적으로 194개교, 5만4천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여 중등학교 학생 전체(8만9천여 명)의 60%가 이 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 같은 시위 규모는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것이었다.
 

장석천 선생 병 보석 출옥 기사(《동아일보》1933년 11월 16일자).

체포된 선생은 광주지역 시위의 배후주동자라 하여 광주로 호송되어 광주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1930년 2월 치안유지법으로 기소돼, 그해 10월 징역 1년6월을 언도받았다. 그리고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1931년 6월에 1년6월의 확정 판결을 받았다. 그는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1년 12월 출옥했다. 선생은 곧바로 사회운동을 재개했다. 해를 넘겨 그의 나이는 어느덧 서른에 접어들었다. 20대의 마지막 두해를 고스란히 감옥에서 보낸 것이다. 하지만 차디찬 감옥도 그의 독립과 민중해방을 향한 신념과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러한 그의 불굴의 투혼에 대해 일제는 “수감 중에도 출감 후의 활동을 획책하고, 출감 후 비약적인 운동 전개를 기약하였다”고 기록하기도 하였다.

그는 경성에 올라가 적색노조를 조직하기 위해 조선제사주식회사의 노동자 박영환 등과 접촉하였는데, 박영환이 체포되면서 선생도 역시 체포됐다. 선생은 친안유지법 위반으로 1932년 12월 징역 2년의 확정 판결을 받았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대전형무소로 이감됐는데, 이듬해지만, 그의 조카 장원에 따르면 당시 그는 폐결핵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당시 교도소 당국이 그의 병명을 숨긴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광주의 집에서 2년 정도 요양을 하였으나, 1935년 10월 18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장석천 선생은 그의 고향 신지도 옆의 고금도 출신 여성과 15세 때 부모의 강요로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는 광주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항상 형사들이 따라다니는 등 못살게 굴었다고 한다.

결국 선생이 세상을 뜬 뒤 선생의 아내와 아들 옥선은 고금도로 내려가 살았다고 한다. 아들은 1924년 갑자년 생으로 1944년 징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운 좋게 살아왔으나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기간 사이에 행망불명된 것으로 알려졌다. 선생이 서거하고 가족들은 그를 광주의 공동묘지에 묻었는데, 경찰이 묘비조차 세우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이듬해 가족들이 묘지를 찾아갔을 때에는 다른 묘지들이 크게 늘어나 끝내 선생의 묘를 찾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1935년 겨울 선생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발간된 ‘신조선’이라는 잡지에는 조선청년동맹의 집행위원으로 같이 활동한 박승극의 추모사가 실려 있다. 추모사는 선생의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못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내용으로만 채워져 있는데, 이는 검열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장석천이여!
- 장송(葬送)을 대신하야

나는 또 한 동무를 잃었다. 마음으로 믿던 그 동무를.
오! 張(장)이여. 동무여.
동무는 왜 좀 더 살지 못하고 이와 같은 쓸쓸한 시기에 그만 가버리고 말았는가?
오! 동무의 그 마음 그 청춘을 나는 무한히 스러워한다.
1929년 봄 나는 이십의 약관, 동무는 좀 더 나이 먹은 청년.
지금은 없어진 서울의 조선청년총동맹 회관. 그곳에서 의기에 넘치는 동무와 나. 각기 중앙집행위원의 일원으로 초대면한 후 얼마 안되어 서로 나뉘어 고생살이 하였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선 언제나 늘 동무의 인상이 떠나지를 아니하였던 것이다.
客年(객년) 12월 뜻밖에도 나는 동무의 나왔다는 말을 듣고 껑충 뛰어 만나 보고자 했더니 마침 출타를 해서 그대로 섭섭히 돌아 왔었다.
이제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한번 만나지도 못한 것이 이 어이 철천의 유한이 아니랴?
오! 동무여. 동무는 차마 어떻게 갔는가?
이런 시기에 나 자신이 이런 부끄러운 생활환경에 놓여 있을수록 동무의 죽음을 더욱 스러워 마지 아니한다.
나의 가슴은 아프다. 탄다.
오! 동무여 그 아까운 죽음을……
이제 동무는 영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오! 張(장)이여. 동무여.

- 박승극, 19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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