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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치사하게 절망하지 않았다

[특집]6월 항쟁과 완도 1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17.06.11 21:22
  • 수정 2017.06.11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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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그때, 우리는!
한 잎의 불멸만을 꿈꿨다.
두 잎의 불면으론 내일을 꿈꿨으며,
세 잎의 사랑으로 독재에 맞섰다.
그리고 네 잎의 우정으로 너와 나, 우리를 지켰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한국사에 일대 변혁을 가져온 사건으로 완도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6월 민주항쟁 이후, 비로소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직선제가 실시되고, 군수를 선출하는 지방자치가 도래했다. 그러나 그 6월은 어느 해보다도 뜨거웠지만 그 무엇도 기록되지 않았다. 지금의 기록은 결코, 치사하게 절망하지 않았던 우리 선조들의 의기와 결기를 우리 후손들이 잊지 않기를 바라는 바람의 발로다.
6월 완도 민주항쟁은 총 4부작으로 연재된다.

내용 중 이견이나 부언이 있으신 독자는 편집국에 제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사진 자료도 찾습니다. 편집국 061-555-2580

 

전남민주회복 국민협의회 완도군지부 결성대회 모습.

1987년 6월 10일 오후 6시
아니 4시부터 5시부터
신새벽 3시까지
목에서 피가 넘어 나왔다
더 이상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피가 나왔다. 그러나
그 새벽 먼동에 목쉰 벙어리로 부르짖어 불도장을 찍었다
민주주의여! 나의 아버지여!

6월 민주항쟁의 아픔을 노래한 고은 시인. 그 저변과 궁극에는 역시나 자유를 노래하고 있다. 자유,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가장 위험하고,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특수한 단어.
동서고금, 깨달은 이들이 한결같이말하는 최상의 사회는 현재의 체제에 대해 구성원과 체제 스스로가 언제나 그 반증을 손쉽게 말할 수 있는 사회라고 했다.

고 김대중 대통령과 최형석 전 도의원 모습(김대중 대통령 왼쪽).


바로 열린사회다.
그 열린사회는 항상 자유로워야 하며, 구성원과 체제는 체제 스스로를 부정해 버릴 수도 있는 주장과 행동까지도 모두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 모든 변화에 있어 능동적이고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며 지도자의 몫이란 이 열린 사회를 가동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게 아니라면 그건 독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 어떤 하나의 사건이 변혁이냐? 혁명이냐?를 판가름 되는 건, 그 사건 이후에 일어나는 사회 현상이다.

그래서 변혁이라는 하나가 일어나면, 반드시 다음 변혁을 부르게 돼 있고 그 변혁만이 진정한 역사라는 점. 그런 점에서 6월 민주항쟁은 대한민국사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은 일대의 혁명이었으며, 완도의 측면에서볼 때도 완도의 근현대사를 바꿔놓은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전남민주회복국민협의회 완도군지부 사무실 모습.


6월 민주항쟁. 1987년 1월 14일 당시 서울대 재학 중이던 박종철 군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하수인 경찰에 강제 연행되어 물고문으로 죽임을 당하자 전국적으로 시위가 거세게 번졌다. 이후 연세대 이한열(연세대 경영학과 2)이 시위 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6월 민주항쟁 기간 내내 사경을 헤매다 온 국민의 애타는 마음을 뒤로 한 채 ‘6.29(항복)선언’이 발표된 지 일주일 후인 7월 5일 세상을 등지게 된다.

군부독재의 정권 체제를 청산하고자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개헌논의에 대해 전두환 정권은 1987년 4월 13일, 이에 대한 논의 중지와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한 정부 이양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4.13호헌조치"를 발표한다. 그러자 종교계 및 재야 각 단체에서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이 잇따라 발표되는 등 비난여론이 빗발쳤다.

1987년 5월 27일, 민통련과 당시 야당인 통일민주당이 주축이 되어 각 사회운동 세력과 종교계, 학생운동 조직 등이 광범위하게 연합하여 건국 이후 최대 규모의 반독재 연합전선을 구축한 정치사회단체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민운동본부 또는 국본으로 줄여 부르기도 함)가 결성된다. 이후 국본은 6월 항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민주화 세력을 결집시켜 정치적 구심체의 역할을 했다.


완도 지역에서도 6월 민주항쟁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당시 항쟁을 주도했던 주역들은 이후 완도의 지방자치를 여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주도한다. 완도 민주항쟁은 국본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범종교계와 재야인사, 완도기독교청년연합회, 지역사회에 대해 민주 의식을 갖고 있었던 이들이 주도했다. 당시 완도 국민운동본부의 상임대표는 민선 1기 완도군수를 지냈던 차관훈 전 군수를 비롯해 공동대표에 이선동 씨(고금), 정우겸 목사, 최형석 전 도의원(작고), 조정훈(군외), 전금죽(완도 대성병원 전이양 원장 부친. 작고) 씨가 맡았다. 운동본부 사무실은 처음 중앙시장 골목 완도유리점 자리에 있다 주도방앗간 2층으로 옮겼다.

6.10항쟁의 신호탄은 박종철 고문치사와 6월 9일, 민주화를 요구하는 교내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직격탄을 맞고 쓰러진 연세대 이한열 열사가 도화선이 되었다. 6월 10일, 전국 20여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박종철군 고문살인 조작·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완도국본은 여건상 광주대회가 열릴 금남로 전남도청에 집결하여 집회하기로 한다. 완도읍에서 모여 봉고차량을 이용하기로 한 회원들은 경찰 방해로 인해 개별적으로 완도를 빠져나가 합류하기로 하고, 고금에서 마량으로 건너가거나 완도읍에서 잔류한 15~6명은 군외면에서 개인 어선을 타고 해남 이진으로 빠져나가 광주로 향했다. 완도경찰이 이들의 상경을 막기 위해 완도대교를 봉쇄했기 때문이다.


집결지인 전남도청은 경찰의 원천봉쇄로 이들은 금남로로 향해 광주전남권 시위대에 가담하게 되는데, 이때 서정창 전 도의원이 최루탄에 쓰리지게 됐다, 일행은 서정창 전 도의원을 인근 식당으로 데려가 최루탄을 물로 씻기며 시위대 뒤편에서 시위를 펼치게 했다.    

당시 시위 도중 연행자로는 완도기독교청년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었던 김정호 완도신문 발행인이었다. 극렬하게 시위에 참여했던 김 발행인은 백골단에 잡혀 광산경찰서 유치장으로 연행되는데, 이때 차관훈 전 군수와 정우겸 목사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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