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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포진에도 거북선이 있었다

[향토사 칼럼] 마광남 / 향토사학자. 전남도 무형문화재 50호(한선기능 전승자)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7.06.25 16:50
  • 수정 2017.06.25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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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좌수영 구선도(이충무공전서, 1795년)
통제영 구선도(이충무공전서, 1795년)


우리는 이순신을 말할 때 언제나 거북선을 떠올리게 된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거북선은 언제부터 있었던 배일까?

우리 정사에 거북선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태종 13년(1413, 2, 5) 임금이 임진강변을 지나다 강에 웅성거리고 있는 배를 보면서 뭐하는 배냐고 묻자 탁신이 거북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가 수전(水戰) 연습을 하고 있다는 기록이 처음 나타나고 그 이후에는 없다가 임진왜란 때 다시 거북선이란 이름의 전선이 등장한다.

거북선에 관한 기록은 이순신이 전사한지 195년이 되었을 때 정조임금(1792)의 지시로 당시 규장각 문신이었든 윤행임(尹行恁, 1762~1801, 훗날 신지도에 유배되었다가 유배지에서 사망)에 의해 이충무공 전서가 집필되고, 193년 만인 1988년 이를 이은상이 번역하면서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럼 우리 가리포진은 언제 설진되었을까? 성을 쌓기 시작한 것은 1521년이고 1522년에 초대첨사가 발령이 되어 수많은 첨사가 지나갔다. 완도향교에는 가리포첨사 선생안이란 기록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모든 첨사들이 언제 와서 언제까지 근무했는지를 적어 두어서 무척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첨사선생안에는 226명의 첨사와 직급, 371년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런데 부임은 하지 못했으나 발령을 받았던 이순신이 빠져있고, 마지막 첨사인 이범규(李範珪)첨사가 1894,(고종31) 7, 5에 가리포첨사로 발령을 받고 근무 중인 1895년 2월 12일의 회의에서 이범규는 군민(軍民)을 사랑하고 잘 보살펴 명성과 치적이 크게 드러났습니다. 특별히 잉임(仍任, 기한이 다 된 관리를 그 자리에 그대로 남겨 둠)시켜 기복(起復)하여 공무를 행하도록 윤허를 하였다. 두 분의 첨사를 포함한다면 마지막 첨사인 이범규가 228대 첨사가 되고 374년이란 긴 세월을 가리포진이 유지되었으며 1896년 2월 3일 완도군이 설군이 되면서 패진이 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왜 이렇게 긴 역사를 가지게 되었을까? 가리포는 왜구가 들어오는 길목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구들이 오도열도에서 출발하여 삼도(거문도)에서 1박을 하고 청산도를 거쳐 가리포 또는 고금진으로 온다고 우리 정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위치에 있는 가리포진에는 어떤 전선들이 있었을까?
만가요람 군정편 4 주사조에는(1800년대의 기록) 각 진에 배치되었던 전선의 수가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볼 때 패진이 될 때까지도 거북선은 가리포진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른 진과 가리포진을 비교해 본다면, 전라좌수영 거북선 1척, 전라우수영 거북선 5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거북선의 배치 비율로 본다면 좌수영은 영이면서도 거북선이 1척뿐인데 가리포는 진(鎭)이면서도 1척의 거북선이 있었고 가까이 신지도에고 1척의 거북선이 있었다는 점에서 가리포진의 중요성을 알 수가 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가리포(加里浦)진에는 전선 1척, 거북선 1척, 병선 2척, 방선 1척, 사후선 4척이 있었고,  600의 수군이 있었다. 고금도(古今島)―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 신지도(薪智島)―거북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 왜선 2척이 있었다.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에 총 5척의 거북선이 있었으나 그 중 2척이 가리포와 신지도에 있었으니  그 중요성이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또한 난중일기의 기록을 보면 크고 작은 작전회의 때 가리포 첨사가 빠진 일이 없었던 것은 그 역할이 매우 컸음을 입증한 것이다.

이렇게 중요시 했던 것은 좌수영이 5포를 관리하였으나 가리포는 8포를 관리하는 큰 진이었고 제주도까지도 가리포가 관리를 하였으니 매우 중요한 요충지임에 틀림없다. 가리포진의 중요성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순신은 1596년 윤 8월 24일에 남망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고 한 도(道)의 요충지임에 틀림없으나 형세가 고립되어 부득이 이진으로 진을 옮겨야 한다는 기록을 난중일기에 남겼다.

가리포 첨사가 첫 번째 부임한 해가 1522년이니 올해로 설진 495년이 되었다.
그동안 우리들은 무엇을 하였는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이제라도 학술회의를 해서 잊고 있던 가리포를 재조명한다니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하나 제안을 한다면 성의 복원도 매우 중요하지만 200명이 넘는 첨사들의 후손들을 찾아서 명예첨사로 임명하고 그분들이 우리 완도를 홍보하고 찾게 한다면 500만 관광시대를 여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마광남 /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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