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푸른 대나무 속 일렁이는 바람소리처럼 ‘서.정.창’

[이 사람]87년 6월 완도민주항쟁의 주역, 서정창 전 전라남도의회 의원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17.07.01 18:25
  • 수정 2017.07.02 13:23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정창 / 전. 전라남도의회 의원


기다리면 기다림의 값어치가 온다
높은 산에 올라 굽이쳐 흐르는 강줄기를 내려다 본 적이 있는가.
산을 만나고 언덕을 만나 꼬불꼬불 흘러가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길인양 당당하고 담담하게 흘러가는 물줄기를 바라보면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그렇게 흘러갈 수 밖에 없는 숙명같은 것이 느껴져 숙연해지기도 하지만 세상의 온갖 것들을 다 녹여내고 견뎌낸 힘이 느껴져 깊은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아~ 아름다움이란 강물이 흘러가 듯 결국 저 깊고 깊은 그릇으로 모든 것을 물처럼 흘러가게 하는  삶이 아니겠는가!
첫 대면은 낭창낭창했다. 조금 시간이 흐르니 굳고 단단한 모습. 돌아서 오는 길엔 결코 옅어지지 않는 푸른 대나무 숲 속에서 일렁이는 바람소리처럼 향기로웠다.
그와 만나 수인사를 나누고나자, 그가 모죽이야기를 꺼낸다.
"한국과 중국, 일본에 자생하는 모죽(毛竹)이라는 대나무가 있습니다. 대나무 중에 최고로 치는 게 이 모죽인데, 모죽은 씨를 뿌린 후 5년 동안 물하고 거름만 줍니다. 그래도 싹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어느 날 손가락만한 죽순이 돋아나 신록의 4월이 되면 갑자기 하루에 70~80cm씩 쑥쑥 자라기 시작해 30m까지 자란다고 하지요."
"왜 5년이란 세월동안 자라지 않았던 것일까?"
"의문을 가진 학자들이 땅을 파보았더니 대나무의 뿌리가 사방으로 뻗어나가 10리가 넘도록 땅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5년간 숨죽인 듯 깊게 뿌리를 내리며 내실을 다지다가, 5년 후 당당하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지요"
“누군가에게 받은 분노를 참아내고 누군가로부터 받은 모욕을 참아내고, 누군가로부터 해를 입고서도 원수갚기를 꺼려하며 참아내는  그 기다림의 나!"
"인내하며 기다리면 그 기다림의 값어치를 다할 수 있는 순간이 분명코 올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대나무로 쑥쑥 커 갈 시간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자유로운 기체가 되어 세상을 내려다 볼 시기가 말이죠.”

황권태 최충옥 김형익 큰 도움 
서정창 전 도의원(만 62). 완도읍 군내리가 출생지라고 했다.
1980년대 초 완도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구도회장과 청해진민주청년동지회장, 민주연합 청년동지회 완도군회장 출신으로 완도군청년회장과 완도군청년연합회장, 제9대 전라남도의회 기획사회위원장을 지냈다.
현재 부인 이수미 씨와 함께 노모를 모시고 슬하에는 서가희(장녀) 서다희(차녀) 두 딸이 있다.
1980년대를 뜨겁게 보낸 한 사람으로서 지역시민운동의 계기를 물었더니, 군 제대 후 지역사회 활동 중 예비군 훈련장에서 황일중 선배를 만났단다.
완도는 타지의 육지군과는 달리 섬으로 구성된 군으로써 황 선배와는 군의 하나된 의견을 모아내고 또한 큰 인물을 키워내는데 애로사항이 많다는 의견을 나눈뒤. 다음날 고금면의 이용섭 친구를 만났단다.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구도회의 구성의 필요성을 공감하면서 구체적으로 조직활동에 들어갔다고.
구도회의 기본적 조직이 완료되어 가던 중, 완도사회 민주화의 거목인 황권태 선생을 만나게 됐는데, 자신의 몸도 잘 가눌 수 없는 병상에서 황 선생은 조국의 민주화에 대한 염원과 지역사회 조직 운동의 필요성을 피력해 정말 머리에 번개를 맞은 듯 번쩍거렸다고. 그 뒤 80년대 지역 청년운동의 일환으로 민주화운동에 나서게 됐다고.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대해서 서 전 의원은 "인간이란 본래 빈손 인생이지만 어렵게 마련한 한샘가구가 건물까지 건축된 상황에서 새주인 등장했는데, 이중 매입으로 사기를 당해 경제적 어려움이 컸다"고. 당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줬는데 최충옥 선배(건축업자), 노화도의 친구인 김형익 씨가 자신들의 집을 담보로 큰 도움을 줬단다.

공동체적 시민의식 함양에 중점
살면서 가장 고마웠던 사람에 대해서는 역시나 아내 이수미 씨를 꼽았다. 어린 나이에 시집 와 현재 99세가 된 노모를 모시기까지 그러면서 가정 경제를 돕는 아내의 그 갸륵한 정성과 헌신은 스스로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했다. 첫 눈에 아내를 사랑하게 됐지만, 요즘 들어 아내에겐 사랑 이상의 사랑을 느끼고 있는데, 아내에게선 언제나 꽃향기와 별빛같은 반짝임이 있단다.
재미있었던 완도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1987.626평화대행진 후 슈퍼 앞 도로에서 마무리 행사할 때 자리의 좌장인 김충식 선배를 막둥이로 술심부름을 시키고 좌중의 막둥이인 임재석 후배를 큰형님으로 모시며 민주화에 대한 의지를 재다짐할 때가 정말 재밌는 추억이었다고.
앞으로 지역 시민운동의 전개방향을 묻자, 무릇 봉사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법으로 회원들의 자체 회비로써 활동을 할 때 더욱 가치가 있고 주변에 호응이 있다고 했다.
운동의 방향성도 정치 지향적인 방향보다는 친절과 봉사, 청결운동을 펼치면서 지역사회의 향토문화 연구를 통하여 공동체적 시민의식 함양에 중심을 두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세계가 자신을 열 때 대지는 우뚝 솟는다. 대지는 모든 것을 지탱하는 것으로서, 세계는 대지의 결단과 규준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뭇 존재자를 자신의 궤도가 열고 있는 터 가운데로 이끈다. 그의 모습이 그리했다.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