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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항쟁 특집]87년 6월항쟁과 완도 4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17.07.02 10:05
  • 수정 2017.07.02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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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완도민주항쟁은 정치권인 통일민주당, 재야인사, 각 사회운동 세력과 종교계, 학생운동 조직, 지역 청년 조직, 지역주민 등이 총망라 된 말 그대로 민주항쟁이었다.

6.10국본 창립대회 당시, 광주 금남로에서 광주전남 시위대에 합류해 시위 현장을 경험한 국본 완도지부는 1987년 6.26완도평화대행진을 도모하기 위해 경찰의 눈을  피해 23일부터 25일까지 완도읍 봉래장, 별장여관에 투숙하면서 밤낮으로 유인물과 플래카드, 피켓과 성명서 등을 마련하며 만반의 준비를 마치게 된다.

이때 주요 인사들의 활동상을 보면...
학생운동권 출신으로 고금도의 김운기 씨는 5.18 당시 조선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독재에 맞서 고문까지 당하며 이후 고향으로 내려와 민주 쌀집을 운영하면서 학생운동 중심의 사랑방 역할을 하게 된다.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고향을 찾을 때면 한 번은 꼭 들린다는 민주 쌀집의 김운기 씨는 주민들에게 이념과 사상적 기반을 조성해 주면서 외부 민주세력과 완도를 연결하는 구심체가 되기도 했다.
 


6.26평화대행진에 앞서 신념과 각오를 다지기 위한 삭발 투쟁도 이어졌다.
당시 삭발에는 투쟁 기간 내내 희생적 면모를 보였던 전금죽 씨를 비롯해 서정창 전 의원, 최종문 임재석 황종환 정길봉 김태봉(고금) 씨, 그리고 성광교회의 오원형 장로가 참여했는데 공개 삭발식을 실시한 게 아니라 이발관이나 시위 장소 인근에서 경찰들 몰래 단행했다.
당시 평화대행진에 참여하는 주민들에게 나눠줄 유인물은 경찰 감시가 워낙 매서워 완도에서 인쇄가 어렵다고 판단해 기청연합회가 광주에서 공수해 왔고, 일부는 지역 인쇄소에서 몰래 소량 인쇄하여 준비했다. 

6.26평화대행진의 전날인, 1987년 6월25일. 국본 관계자들은 봉래장에 투숙하며 출정식을 준비하는데 프랭카드는 최형석 전 도의원이 전담했고, 유인물의 초안은 고려대 출신의 신익현 씨가 맡아 작성했다. 6월 24일까지 완도평화대행진이 일어날 것이라곤 까마득하게 인식하지 못했던 완도 경찰은 최소한의 비상 병력만을 남기고, 치열하게 전개될 것으로 예상됐던 광주 목포 등으로 병력을 이동했다.
 


드디어 날이 밝았다.
경찰은 완도에서 3.1운동과 맞먹는 많은 인파가 몰릴 6.26 평화대행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게 아니라면 별 일이 있겠느냐 간과했을 것이다.
그런데 뒤늦게 대규모 6.26완도평화대행진의 첩보를 입수하고 경찰은 이른 아침부터 작전을 펼치듯 주동자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제일호텔에서 투숙하며 평화대행진에 합류하려던 서정창 전 도의원을 체포했다. 당시 경찰에선 시위를 막기 위한 전략을 짜고 주동자만 감금하면 시위가 무산될 줄 알았다.

서정창 전 도의원은 "경찰에 연행 돼, 봉고차로 이동하는데 대가용리의 방공탑에 이르자 순간적으로 봉고차문을 열고 하수구로 기어 들어갔다. 하지만 경찰들이 하수구의 앞뒤를 막고 있으니 결국 나올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연행됐다. 경찰이 데리고 간 곳은 인근 해남 삼산면의 어성교 민물장어 식당이었다. 그곳에서 이인선 씨를 만나 연행된 줄 알았다"고 술회했다.

김정호 본보 발행인은 대행진 전날에 기청 소속 청년들 3~5명과 함께 봉래장에 투숙하면서 평화대행진 때 쓸 플랜카드와 피켓을 준비했는데, 기청 소속 김성민 씨가 글씨를 잘 써서 플랜카드와 피켓을 도맡았다. 6.26일 오전 8시 30분 경,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긴장하면서 문을 열었더니 이미 경찰이 봉래장을 봉쇄한 상태였다. 당시 형사는 "어이 동생, 시위하지 말고 우리 바람이나 쐬러 가세"라며 말했다.

이에 김정호 발행인은 순순히 경찰이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아서 2층 난간으로 다가가서 "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뛰어 내리겠다. 여관 주변에 둘러싸고 있는 의경들을 물리쳐라. 우리는 평화적으로 시위할 것이다"고 외치자, 경찰은 자칫 불상사가 예상됐는지 비켜줘 김 발행인 일행은 시위대에 합류할 수 있었다는 것.
 


평화대행진은 오전 9시, 최종문씨가 운영하던 대우라사와 국본 사무실에 집결하여 군청 정문을 시작으로 경찰서→항만청→1부두(주도 앞)→수협→군청 광장에서 해산하기로 계획했다. 시위대 약 25명은 “호헌철폐”“군부독재타도” 등을 외치며 군청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그런데 10여분 쯤 지나 국제서림 앞에 당도했을 때, 전경 50여명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군청을 향하는 시위대를 막았다. 20여명의 시위대는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경찰의 봉쇄망을 뚫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시위대는 연좌시위에 들어갔고 오후까지 이어졌다. 이들의 시위 소식이 읍내에 퍼져 나갔고, 이때 기청 소속의 김창수 씨와 서정창 전 의원, 이인선 씨,  최종문 씨 등이 경찰에 연행됐다는 소식이 함께 전해졌다. 오후 3시 경이 지나자 경찰의 봉쇄망 주위로 주민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더니, 어느 새 2천여명이 넘어섰다. 시위대는 더욱 목청을 높여 “군부독재타도”와 “연행한 민주인사를 석방하라”를 구호를 외치며 시위대와 전경들 너머에 있던 군민들을 향해 함께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시위대 반대편에 있던 군중들도 한 목소리로 시위대를 막고 있는 경찰과 전경들을 향해 행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경찰은 아랑곳하지 않고 막아섰다. 시위대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전경과의 몸싸움이 반복되면서 한 전경이 시위 차량의 안테나에 걸려 있는 태극기를 찢은 사건이 발생하면서 경찰 봉쇄망을 뚫게 되는 도화선이 됐다.
 


그 모습에 성난 군중들은 “와”하고 외치며 전경 봉쇄망을 밀쳐 뚫었다. 반대편에 연좌 시위하던 시위대와 하나 되는 순간이었다. 분출구를 찾은 군민들의 의식은 급격히 변해갔다. 처음에는 호기심 반, 냉소 반으로 지켜보던 군민들까지 시위에 적극 가담하기에 이르렀다. 극도로 흥분한 일부 군민들은 “경찰서를 점거하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국본은 이를 저지하고 자제시키고 애초 계획했던 대로 군청 앞에서부터 평화 대행진을 진행했다. 이때 함께 부르던 노래는‘투사의 노래’와‘애국가’였고, 평화 행진을 이어간 시위대는 오후 5시 무렵 5천명으로 불어났으며, 완도군청 앞 광장에 모인 오후 6시 경에는 약 8천여 명에 육박했다. 완도군청 앞 광장에 도착한 시위대는 연행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연좌시위를 벌였다. 그러면서 국본은 즉석 대중 집회를 유도했다. 광주나 도시권 시위에 참가하고 돌아 온 군민들의 경험담을 말하거나 자발적으로 일어나 독재에 대한 열변을 토해 내게 했다.

함께한 군중 모두가 만세를 부르며 평화대행진을 자발적으로 해산했다. 당시 그 뜨거운 군민의 열기에 독재정권의 6.29 항복 선언은 이미 예감됐다는 게 국본 관계자들의 말. 시위대 추산 8천명이면, 각 면단위에서 참가한 주민들과 완도읍 주민들 거의 대부분이 시위에 가담했음을 예상 할 수 있는데 3.1운동 이후 완도에서 가장 큰 군중시위로 기록되고 있다.

후일 완도평화대행진에 대한 평가는 전체적으로 시위 주도세력이 대중의 열기 및 자발성을 수렴해 내지 못한 것은 지역의 특수성에 따른 조직에 한계의 한계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개별적으로 참여 할 수밖에 없었던 6.10전당 대회에 조직적으로 가담하거나 6.26평화대행진을 지역 내에서 주최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운 것은 큰 성과였다고 밝히고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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