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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때까지...

[6월 민주항쟁 특집]87년 6월항쟁과 완도 episode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17.07.02 10:14
  • 수정 2017.07.02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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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6월항쟁 완도의 본고에서는 스토리 전개 상 쓰기 어려웠던 이야기를 에피소드 형식으로 담았다.
 
서정창 전 도의원의 후일담이다. "구도회가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각 읍면 청년회의 창설을 도모하게 되는데 회원들이 금일에 갔을 때, 그곳 청년들과 의기투합하며 시국담론을 주고 받으면서 저녁 시간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고.

"밥 때가 한참 지나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금일 친구였던 차정문 씨의 집으로 무작정 쳐들어가게 됐다"고.
"당시 부부 내외는 깊은 잠에 들어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이불을 확 들췄더니 부부가 화들짝 놀라 잠을 깼다"고.
"둘이 팬티바람으로 잠을 자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도 우린 능글맞게 밥 좀 주라!"고 했단다.

또 소안면을 방문했을 때,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술자리를 열어 "우리 한 번 해보자." 고 의기투합하는데, 동네 수퍼의 술을 모두 마셔 술이 다떨어져 버렸다고. 그리해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는 노양완 씨의 부친이 소안 주조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노양완 씨에게 다음날 주조장에서 팔 것을 가져와 술자리를 이어갔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노화에 들어갔을 땐 이런 일도 있었다고. 섬에 들어갔지만 다음 날 태풍이 불어 배가 뜨지 못하자 서정창 전 도의원과 김형석 임재석 씨 셋이 고스톱을 치게 됐다고.
가진 돈이 없어 서로 각자의 집문서를 걸고 고스톱을 치는데, 서정창 전 도의원은 한샘씽크를 내놓고 5억원, 노화도의 김형익 씨는 오거리 선구점을 걸고서 3억, 임재석 씨는 1억을 각기 걸어놓고 맞고를 치는데 마지막 승자가 임재석 씨였단다.
그래서 현재 한샘씽크는 임재석 씨의 것이라는 우스개소리도 전했다.

서 전 의원은 1980년대 집회가 있으면 구도회원들과 참석했는데, 서울 대구 부산 역사의 현장 속에서 함께했단다. 한 번은 완도대교에서 경찰 불신 검문이 이뤄졌는데  화물차를 얻어 타고 운전석 뒤편에 누워 5시간에 걸쳐 영등포 시장을 갔던 적도 있었다고. 결국 이러한 활동 속에서 완도청년회가 주관해 '접시꽃 당신'으로 유명한 도종환 현문체부 장관과 문동환 목사를 초청해 민주주의와 청년의 역할 등의 강연을 통해 청년 의식 고취에 힘썼다고.

6.26평화대행진과 관련해서는 전국에서도 거주민들이 가장 많이 참여하면서 가장 질서 있게 진행된 곳이 완도와 무안이었다고 전했다.
대통령 직선제라는 6.29항복을 받아낸 6.26완도평화대행진은 완도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선태 황권태 선생의 숭고한 나라사랑과 민주정신을 잇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전금죽 백규헌 씨의 정신적 뒷받침이 대행진을 이끄는 큰 힘이었다고. 거기에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내놓을만큼 실천가였고 행동가였던 이경국 최종문 김정호 씨와 같은 이들이 있어 완도의 의기를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고 전했다. 그때 조심스러웠던 부분은 각자의 추구하는 이념과 성향이 달라 민주화운동이 잘못 진행될 수도 있었지만 무사하게 마칠 수 있어 인생에서 참으로 감사한 시간이라고 전했다.

활동가로 활약했던 김정호 본보 발행인은 가장 위기의 순간을 대공분자로 몰렸을 때라고 회상했다. 그 당시 완도기독교청년연합회 회장이었던 김정호 발행인은 "전두환 독재정권 타도" 유인물 3천부를 배포하게 됐는데, 완도 경찰 대공 담당부서에서도 이러한 행위를 간첩으로 분류하며 김 발행인을 체포하기 위해 집으로 찾아왔다고.   

경찰의 방문에 김 발행인의 부친은 “아들이 사고치고 경찰에 들락거릴 애가 아니다. 돌아오면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게 하겠다”라며 경찰을 돌려보냈다고. 김 발행인은 이후 은신처를 교회로 삼고 몸을 피신하면서 동향을 살폈다. 김 발행인은 여기 저기 안전조치를 하고나서야 경찰을 찾아 조사를 받았다. 이 때 제작 배포한 전단지를 간첩 유인물 철에 분류한 것을 보고 솔직히 겁이 났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제일교회 최용안 장로와 성광교회 정우겸 목사, 그리고 기독교인권위원회가 나서서 별 문제없이 나올  수 있었다면서 참 고마운 이들로 기억했다.

최형석 전 도의원이었던 오희자 씨의 증언도 인상적이었다. 6월 완도민주항쟁 당시 돈을 많이 희사했던 사람으로는 조정훈 씨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줬다고.
또 민주화운동 이후 지방자치가 시작되고 최형석 전 도의원이 당선 된 후, 남편을 욕하던 정적의 자녀가 道 공무원으로 채용될 당시 희자 씨는 남편에게 “우리를 욕한 사람인데 도와  주지 않았으면 한다”는 투로 말했지만, 최형석 전 도의원은 "여보, 그래도 우리 완도 사람이 아닌가! 완도 출신이면 한 가족이지 적하고 아군이 따로 없네”라고 핀잔을 들었다고 했다.
또 한 번은 아들이 코를 다쳐 해남이나 광주 목포 쪽 병원으로 가려고 했는데, 남편은 아들에게 말하길 "넌 완도사람이니까 완도에서 수술하라"며 결국 완도에서 수술을 받을 만큼 최 전 도의원의 지역사랑도 남달랐다고.
 


열혈남아 최종문 씨의 증언.
그는 629선언이 있고 나서 토반다방 5층 건물에 “세계는 6.29 한국은 노태우”라는 정권이 내세운 현수막에 하늘을 찌를만큼 크게 분노했다고. 결국 단도를 차고 올라가 철거한 후, 자신이 운영했던 대우라사에서 동지들과 축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고.
또 5.18이후 개헌 서명운동에 돌입했을 때 완도에서 3,100명의 서명을 받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있는 동교동으로 전달했을 때, 최종문 씨의 이름을 직접 쓴 김 전 대통령의 휘호를 핸드폰 사진첩에 두고 아직까지도 꺼내 보며 흐뭇해 했다.

1980년 5.18 당시 완도에는 큰 사상자가 없었는데, 이는 김동인 최형석 씨와 같은 지역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 당시 재산과 청춘을 어떠한 보상도 없이 어려운 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이 있었다고 했다.
1980년대 민주운동협의회 결성 시, 지성인들의 행동하는 양심을 보았을 때 가슴이 너무나 뜨겁게 타올랐는데, 협의회 창립 때 전금죽 씨와 박영록 김성락 목사의 연설은 아직도 가슴에 남아 메아리 치고 있다고 밝혔다.

그 당시 창립식 장소가 어려워 누구도 장소를 제공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완도극장을 운영했던 최시안 씨가 선듯 장소를 빌려주고 그 다음날로 완도극장이 폐쇄 됐는데 아직까지 피해 보상도 이뤄지지 못한 것을 애석해 하고 있었다. 또 기억나는 이로는 민주화운동을 위해 헌신했던 정세진 친구가 경찰서에 연행됐을 때 힘이 없어 소중한 친구를 지켜주지 못한 게 지금까지도 가슴에 남는다고.

함께했던 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변절 된 모습도 보여줬지만, 그때의 뜨거운 우정만큼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한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완도 민주인사들은 언론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쌈지 돈들이 모아져 지금의 완도신문을 탄생시켰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치열하고 뜨거웠던 1980년대. 취재 도중 만났던 인물들의 마음은 아직도 그 때에 머물러 있는 듯 했다. 가장 절박했던 시간이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처럼.

기자 주> 그동안 취재에 협조해주신 이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취재과정이 짧아 더 많은 이야기와 인물에 대해 서술하지 못한 점은 정중히 사과 말씀드립니다. 아울러 차후 기회가 되는대로 이어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아는가 그대는
육신이 어떻게 피를 흘리고
영혼이 어떻게 꽃을 키우고
육신과 영혼이 어떻게 만나
꽃과 함께 피와 함께 합창하는가를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 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여기여차 건너 주자.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 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 주고,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 김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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