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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향기 천리를 가고 만년동안 향기로운 덕(德) 2

완도 風水 2 <고금도 덕동>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17.07.07 20:15
  • 수정 2017.07.0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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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재침인 정유재란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수군 총본영이 있었던 고금도. 이충무공이 노량에서 전사하고 그 유해가 잠시동안 모셔졌던 덕동마을.

이곳에 전해오는 전설 중 하나는 이충무공이 덕동의 수군 본영에서 그의 마지막 전쟁이었던 노량해전에 출정하던 날(1598년 11년 9일) 그의 죽음을 예상이라고 한 듯 덕암산의 모든 부엉이들이 울었다고 하는데, 이후 이곳 정산의 바위를 '부엉이 바위'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 하나는 이충무공은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명량해전의 대승을 거둔 이후, 전라우수영이었던 해남 문내면의 본영을 놔두고 왜 조선수군의 총본영을 이곳 고금도로 옮겼을까?

역사학계에선 "일단 우수영은 육지에 접해 있어 왜군의 공격을 받을 여지가 높았는데 우수영 앞바다로는 왜수군이 공격하고 육지로는 왜육군이 공격하면 외통수에 걸릴 수밖에 없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피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반면 고금도는 가리포진이 있고, 신지도진에다가, 인근의 조약도와 금일도, 청산도까지 지형적으로 전술운용이 용이했고 무엇보다 바다가 주업인 어부들이 많았으며, 당시 조선수군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 바로 수군이 될 수 있는 뱃사람들이었다고.

여기에 고금도는 선박을 건조할 황장목(적송)이 조선에서 가장 많았다.
왜수군의 안택선은 삼나무가 재질로 황장목에 비해 강도가 현격히 낮았는데 황장목선과 삼나무선이 충돌하였을 때 파손되는 선박은 삼나무 선박이었다고.
또 조명수군 연합군의 본영이 된 이유는 당시 명나라가 지원한 4백 여척과 조선수군의 70여척이 머물기엔 고금도 이상 좋은 곳이 없었다고.

그런데다가 지금도 바닷일보다는 농사일이 더 많은 고금도엔 농토가 많았고, 농토 또한 미네랄이 풍부한 해풍 때문에 비옥한 토지를 경작해 군량 확보에 용이한 장소였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순수하게 고금도에서만 모아진 병력이 5천5백여 의병. 이것은 고금도로 이주한 주민의 호수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당시 고금도로 이주한 호수가 2만여호가 넘었다고 향토사학계는 말하고 있다.

여기에 잘 알려진 비화 중 하나는 이충무공이 신력(神力)을 신봉했다는 이야기다. 난중일기에서도 이충무공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군인의 감각을 발동하는데, 그가 감각적으로 본 건 하나같이 명당의 요건이 충족되는 곳이었다. 1594년 7월13일의 난중일기에서도 이충무공이 직접 '척자점(擲字占 윷점)'을 친 대목이 17회가량 나오는데, 이 중 14회는 직접 쳤고, 3회는 점쟁이를 시켰다.

물론 이충무공은 자신의 입신양명이나 부귀영화를 위해 점을 치지 않았다.
하나같이 전투의 승패나 가족들의 걱정, 후원자 유성룡이 아플 때 점을 쳤는데....(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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