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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포진과 능노군

[특별 기고]정영래 / 완도문화원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7.07.15 21:23
  • 수정 2017.07.16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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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래 / 완도문화원장

 완도사람으로 가리포진을 알고 있는 군민이 몇이나 될까?
완도는 섬이다. 상왕봉을 중심으로 지금에 완도읍과 군외면이 합하여진 섬이 완도였다. 1522년 조정에서는 왜구의 침탈이 자자지면서 완도에 수군진을 설치하도록 명령한다. 완도진이라고 하면 섬 전체의 이미지가 포함되기 때문에 포구 이름을 하나 더 만들어 가리포진이라는 이름으로 명명했다. 加(가) 里(리) 浦(포) 鎭(진)!

청해진이 828년 만들어지고 가리포진은 1522년 만들어졌다. 1896년 완도가 군으로 되면서 가리포라는 이름은 쓰지 않았다. 지금의 완도읍이 가리포진이다. 가리포진은 372년 동안 유지되었으며 많은 역사를 만들었다.

완도읍 군내리에는 가리포진동헌(청사)이 있었고 지금의 완도군청 청사가 가리포진 동헌이다. 그리고 남망산 아래쪽으로 성곽을 쌓아 가리포진 동헌과 주민을 보호하였다.
청해진과 가리포진은 수군 진지이면서 항구였다.

청해진은 1200년 전 장보고가 동북아를 아우르는 해양물류 및 해양경찰 업무를 담당하였던 다목적 국제항 이였다면, 가리포진은 조선시대 왜구 및 왜적을 방어하는 군사기지였다. 인근 고금, 신지, 청산, 소안, 노화 지역의 수군 외에 제주도, 진도의 금갑, 남도, 강진 마량, 장흥 회진 등의 광활한 지역을 방어하는 막강한 수군기지였다. 따라서 첨사 직위도 전라좌,우수사 다음가는 높은 품계였다. 이순신도 전라좌수사로 임명받으면서 제54대 가리포진 첨사를 거쳐 갔다.

완도 즉 가리포진에서 만들어진 조선의 영웅 이순신!
이순신은 명실공이 인정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영웅이다. 그 영웅의 뒷면에는 무엇이 있었던가? 가리포진의 능노군(能櫓軍-노군)이다. 능노군이 무엇인가? 노를 잘 젓는 군인! 그러면 노는 누가 잘 젓는가? 섬사람들이다. 왜 섬사람들이 노를 잘 젓는가? 노가 없으면 한 마장 바다도 건널 수 없다. 따라서 섬사람들에게는 노가 발이다. 능노군은 섬사람 즉 어부들이다. 이순신은 이 어부들을 이용하여 전쟁에 승리하였다.

전쟁은 장수 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장수는 전술 전략만 지휘할 뿐 전투는 병사들이 한다. 특히 수전에는 노 젓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 노를 잘 저어야만이 이길 수 있었다. 노군은 섬사람 즉 섬놈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당시 섬사람들은 조선 계급사회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 섬놈! 하면 쌍놈이다. 천민노비도 섬사람을 하시하였던 시대였다. 이순신은 이 섬사람들을 우대했다. 그리고 존중했다. 이것이 이순신의 리더십이며 지휘능력이다.

노젓는 기술은 하루아침에 숙달된 것이 아니다. 배 멀미에 면역되기까지 6개월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젓는 노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했다. 노젓는 것이 직업화 되어 있을 때 자연스럽게 기술자가 된다. 그것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능노군이다.

완도에는 군선을 건조하는 황장목이 조선에 가장 많이 확보되어 있었던 곳이다. 따라서 군선이나 세곡선을 건조하는 배무이(선박건조기술자)가 많이 있었다. 가리포진에서 군선을 건조하고 능노군이 많다는 것은 이순신이 바라던 지역이다.

이순신은 1597년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을 받고 제일먼저 했던 일이 자신이 가장 신임하던 이영남을 가리포진 첨사로 임명하는 일이었다. 가리포진첨사 이영남은 명량해전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가리포진에서 이순신을 보좌하였다. 고금도로 통제영을 옮기면서 바로 이영남을 가리포진첨사를 겸한 조방장으로 임명하면서 가리포진에서 판옥선과 노군을 확보하였다.
고금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진하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이영남 두 분은 같은 시간에 장열하게 전사하면서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마무리 되었다.
이순신과 가리포진 능노군은 나라를 구한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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