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작은 사건

[완도 시론]박준영 / 변호사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7.07.22 13:44
  • 수정 2017.07.22 13:46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준영 / 변호사

 “드레퓌스가 결백함을 나는 맹세코 주장합니다. 나의 생애와 명예를 걸고 확언합니다. (…) 내가 얻은 것, 내가 이룩한 명성, 또한 프랑스 문학의 성장에 기여한 나의 공적, 이 모든 것을 걸고서 나는 드레퓌스가 결백함을 맹세합니다.”

너무도 유명한 에밀 졸라의 고발장입니다. 1894년, 독일과 전쟁 중이던 프랑스는 유대인 대위 드레퓌스가 독일대사관에 정보를 팔았다는 간첩 혐의를 씌웁니다. 몇 년 뒤에 진범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군부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은폐했습니다. 다행히 드레퓌스는 프랑스 지식인들의 압도적인 지지와 격려 덕분에 1906년에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제가 맡았던 재심 사건들과 참 닮아 있습니다. 익산 택시 기사 살인 사건에서도 진범을 풀어 주고 열다섯 살 어린 소년이 계속 형을 살도록 방치했습니다.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에서도 자신들의 잘못을 덮기 위해 진범 3인조를 풀어 주고, 지적장애를 지닌 세 사람을 계속 옥에 가두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드레퓌스 사건은 이들 사건들과 또 많이 다릅니다. 대한민국은 이들 사건에 무심했고, 지식인들은 시국 사건, 정치적인 사건들에 보이는 관심의 일부라도 이들 억울한 사회적 약자들에 나누어 주는 것에 인색했습니다.

제게 도움을 요청하는 분들 중에는 이런 분도 있습니다. “변호사님은 큰 사건을 하시는데, 저 같은 작은 사건을 도와주기는 힘드시겠지만, 관심을 가져주세요”라고 합니다. 제가 맡아 진행했던 사건들이 처음부터 시민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던 건 아닙니다. 공론화를 통해 관심을 모았던 사례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사건에 관심 가져달라는 조언을 듣는 건, 다소 억울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분이 스스로 자신의 고통을 ‘작은 사건’으로 규정짓는 모습이 참 안타깝습니다. 매일 고통 속에 살고 있고, 너무 힘이 들어 간절히 도움을 요청하는 분이 자신의 사건을 작은 사건으로 규정짓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사회는 사회적 관심이 이슈나 가치 위주로 모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작 피해를 입었지만 사회적 관심 밖에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신이 도움받지 못하는 상황을 이해하려다 보니 작은 사건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회적 의미가 더 부각되어야 할 사건이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의미가 기준이 되어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여러 고통을 ‘큰 사건, 작은 사건’으로 나누는 것은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이라는 가치와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수많은 사법 피해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고통을 작은 사건으로 규정짓지 않게 우리의 관심이 사회 구석구석에 미쳤으면 좋겠습니다. 소외받는 사람들에게 에밀 졸라와 같은 든든한 지원군이 더 많이 생겨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