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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포진 학술 세미나에 즈음하여

[완도 시론]배철지 / 시인. 향토사학자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7.08.01 10:14
  • 수정 2017.08.01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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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지 / 시인. 향토사학자

 이번 주 완도신문의 발행일인 7월 28일에는 완도읍 장좌리에 있는 장보고 기념관에서 “가리포진에서 이순신을 만나다”라는 주제로 가리포진에 관한 학술 세미나가 열린다. 가리포는 청해라는 옛 이름 이후에 완도로 불리어 오다가 1521년에 새롭게 얻은 이름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폐진이 될 때까지 사백이십 여년을 왜구와의 싸움에서 늘 첨병의 역할을 했었고, 멀리 제주로부터 전남 남해안에 위치한 5개의 만호진을 휘하에 둔 종3품 첨절제사가 주둔하는 진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왜구와의 싸움에서 흘린 선연히도 붉은 선열들이 흘린 피의 역사를 잊었다. 가리포진이 정유재란의 후방 보급을 하기 위한 중심이었던 사실도 잊고, 충무공이 가리포진의 첨사였던 사실도 기억 속에 묻고, 가리포진이 호남의 제일가는 번이었다는 것도 현판에만 의존하여 이야기 하고 말았고, 인진왜란을 실질적으로 종식시킨 석장포 전투에서 왜선 70여척을 불태운 지휘자가 최강첨사라는 사실도 비석 하나로 기억하고 말았다. 그랬으니 함께 몸 바쳐 싸운 우리 민중들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비록 작은 규모이고, 가리포진의 시작과 끝을 모두 조망한 것이 아닌 첨사들과 성곽과 선소를 이야기 하고 복원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기는 했으나 잊었던 사실들을 끄집어내어서 세상으로 들어내기 시작했고 그 시작은 바로 학술 세미나인 셈이다.

그렇지만 시작은 시작일 뿐이니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해야만 한다. 그 중의 우선은 가리포진사(加里浦鎭史)를 복원하는 일이다. 수군의 진은 육지에 있었던 병영과는 그 성격이 사뭇 다르다. 수군은 바다를 싸움터로 삼는다. 그래서 전투가 벌어지면 바다 사람들의 경험과 활동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래서 가리포진의 작은 역사는 첨사 몇 명의 이름에 기댄 것이 아닌 바다를 잘 알아서 물길을 다잡고, 바닷길을 잘 알았던 사람들과, 배를 튼튼하게 지었던 배무이들과, 배를 건조할 나무를 관리했던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이 함께 살았던 완도의 이야기도 함께 담겨 있어야만 한다.

가리포진사의 복원은 다분히 인문학적인 영역이다. 그런데 그 역사가 온전히 보존되어 다시는 잊히지 않도록 하려면 그 것을 담아둘 곳집이 필요하고 그 곳집의 역할을 하는 것은 가리포진일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진이였다는 것을 입증할만한 근거가 없다. 그래서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진을 복원하는 일이다. 성곽과 여러 관아를 되살려 그 역사를 새길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데군데 남아 있는 성곽의 흔적들이 모두 없어지기 전에 보전 작업을 시작해야만 하니 그 처음은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는 곳을 "향토유적“으로, 옛 터가 남아있는 일대를 “향토유적보호구역”으로 지정을 하는 일이다. 여러 지역에서 발굴 복원하고 있는 성곽들의 사례를 보면 우선 향토문화재로 지정을 하고 근거를 확보하기 위하여 발굴을 한 다음 도 지정문화재로, 그 이후에 국가 지정문화재로 인정을 받은 경우가 태반이었다. 우리도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서 복원하는 일이 순조롭게 되도록 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여러 일들이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료를 찾아내기가 어려울 것이고, 예산 확보에도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렇지만 계획을 세우고 이를 우리 군민 모두가 알 수 있도록 널리 알리고 두루 의견을 구해서 한 뜻으로 의견이 모인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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