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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 술병엔 그림자의 피리소리가 묻어 있는 그 바닷가

[에세이-詩를 말하다]김인석 / 시인. 완도 약산 넙고리 출신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7.09.24 13:51
  • 수정 2017.09.24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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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
바닷가
가물가물 멀리 떠 있는 섬을 보아라
홀로 견디는 것은 순결한 것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
거기 있다

       -오세영, <바닷가에서> 전문
 

김인석 / 시인. 약산 넙고리 출신

내 고향인 완도신문에서 ‘갱번’이라는 어휘를 접하고 나도 깜짝 놀랐다. 내 기억의 소유에서 잊어버린 것인지, 잃어버린 것인지 한참을 멍하니 생각하다가, 기억해 내지 못한 채 그냥 고향의 아름다운 낱말로 가슴에 새겨두기로 했다.

벌써 고향을 떠나온 지도 30여 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법도 하겠다고 스스로 위안을 하면서 고향에서만 사용했던 몇 개의 낱말들을 기억해 곱씹어 보고, 조약도의 마을 이름과 내가 자란 ‘넙고리’라는 동네의 지명들을 떠올려 보았다. 쉽지 않다는 사실에 또한 깜짝 놀랐다.

그런데 한 곳의 지명은 아직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이 탓으로 돌리려니 왠진 내 고향에게 미안하다. 특히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고향은 더욱더 그리워지고 가슴 한켠에 멍울 같은 것이 맺혀지곤 한다.

바다는 내가 힘이 들 때 때로는 나의 전부였고 진정한 친구였고 포근한 엄마였다. 답답할 땐 무작정 차를 타고 바다를 향하는 내 모습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바다, 홀로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의 평화가 물밀 듯이 번져오는 것을 아니, 그 환희를 어떻게 말할 수 있으랴.

노을이 있는 그 바닷가, 그 포구의 비인 술병엔 그림자의 피리소리가 묻어 있는 그 바닷가는 또한 아름다운 은인이기도 했다.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바닷가/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거기 있다.” 바다는 나의 모든 것을 받아주었다. 나의 투정이며 독백처럼 내뱉은 나의 마음이며 눈물 나게 고마웠다. 바다는 그랬다.

법성포구의 갈매기는 나에게 행복을 주었고, 통영의 밤바다는 백석의 첫사랑 박경련이 아닌 누군가를 생각하게 했고, 목포의 밤바다는 나에게 그리움과 슬픔과 아픔을 동반한, 긴 여백이 있는 여운을 남겨주었고, 여수의 밤바다는 도시의 찬란함만 묻어 있어 오히려 아련한 쓸쓸함만 던져주었다.

그래도 바다는 좋았다. 마냥 바다에 함몰되어 켜진 밤등의 불빛만 쳐다보기만 했다. 마음 안에 놓지 못한 그리움 하나와 서러움 하나를 소유한 채, 바다는 모름지기 숨통이었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바닷가/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마침내 밝히는 여명/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거기 있다” 바다는 나의 전부를 알고 있었다. 슬퍼하는 이유도 가을 같은 마음도 바다는 알고 있었다.
바다는 그랬다.

내 고향 조약도 바닷가에는 여름 해수욕장이 있고, 정말 내가 그리워하는 겨울 성륜절이 있고, 비 내리는 내소절 연화문살이 있고, 그 안에는 행복도 슬픔도 모두 있었다. 또한 내 어릴 적 첫사랑 그 소녀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다를 더욱 사랑한지 모르겠다.
바다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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