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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왕묘와 충무사

[완도 시론]배철지 / 시인. 향토사학자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7.10.25 08:18
  • 수정 2017.10.25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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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지 / 시인. 향토사학자

고금도에는 중국의 군신인 삼국지의 명장인 관우를 모시는 관왕묘가 있었다. 관우는 명나라에서 ‘나라와 백성을 수호하는 무신(武神)’으로 선포될 만큼 숭배의 대상이며, 유가에서는 관부자(關夫子)로, 불가에서는 관제보살(關帝菩薩)로 숭앙받고, 상인들에 의해서는 재복신으로 숭배된다. 관우를 모신 묘당을 흔히 관왕묘라 하는데, 관성묘(關聖廟), 관제묘(關帝廟), 관묘(關廟), 관황묘(關皇廟)로도 불린다. 정유재란 발발하자 진린은 1598년 7월 전함 수백 척과 2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순신 장군의 진지가 있는 고금도 덕동리 뒤편, 묘당도가 보이는 해변에 주둔하였다.

이때 진린 제독은 묘당도에 중국인들의 숭배 대상인 관왕묘를 세우고  군신(軍神)인 관우(關羽)와 해신(海神)인 마조(媽祖) 등을 함께 배향하고 명 수군의 제향을 받았다. 1666년 현종7년에 전라 우수사로 부임한 유비연(柳斐然)이 중수하고 관왕묘 옆에 옥천사를 지어 사당(祠堂)을 관리하고 제사(祭祀)를 모시게 하였다. 숙종 9년(1683)에는 관왕묘 서쪽에 사당을 새로 짓고 충무공 이순신을 모시도록 하면서 동무(東廡)에는 관운장과 진린, 서무(西廡)에는 이순신 세 분을 모시는 사당이 되었다. 현종때는 경칩과 상강 두차례에 걸쳐 영암, 강진, 보성, 해남 등 6개 부군현 관원들이 제수를 갖추어 제사를 모셨으며, 정조 15년(1791)정조께서 직접 탄보묘(誕報廟)라는 어필 현판을 하사하고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명나라 장군 등자룡을 함께 모시게 하였다.

등자룡은 진린의 부장으로 70세 노장으로 이순신과 같은 전투에서 용맹을 떨치고 전사한 명나라 장수 이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관왕상과 위패를 비롯하여 투구, 서적, 벽화, 현판 등의 유물 일체들이 바다에 던져졌고 옥천사의 불상만이 가까운 백운사에 옮겨져 보관되었다. 그러나 1940년 관왕묘는 훼철되었고 이때까지의 역사는 대략 342년이었다.

해방 이후에는 고금도 유림이 중심이 되어 관왕묘가 있던 자리에 사당을 재건하여 현판을 충무사로 바꾸어 충무공을 정전(正殿)에 모시게 하였다. 1959년에는 이순신의 보좌관인 조방장이며 당시 가리포 첨사 이영남(李英男)을 동무(東廡)에 모시고 매년 4월 28일 충무공 탄신기념제와 11월 19일(음력} 순국제(殉國祭)를 지내고 있다. 그래서 충무사의 역사는 길게 잡아서 70년이다.

한편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 과제 중 하나인 이순신 호국관광벨트 구축은 올해부터 2022년까지 진행될 예정이며 이순신 관련 유적과 사료들을 체계적으로 복원하고 정비해서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완도에서 충무공의 유적은 어디에 있을까? 두 말할 것도 없이 고금도 덕동에 있었던 고금도진일 것이다. 묘당도 일대는 오히려 명나라 수군의 진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업이 역사에 맞도록 진행되려면 충무사는 덕동의 고금도진에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지금의 충무사는 관왕묘로 되돌리는 게 맞아 보인다.

관왕묘가 비록 중국의 민간신앙을 기초로 한 것일지라도 그 이름을 가지고 342년을 역사에 올렸으니 이미 우리의 유산이 된지 오래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인물로 충무공이 살아 있도록 하려면 저 궁벽지고 좁디좁은 한 켠에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된 집에 세 들어 사는 것처럼 배향하지 말고 제대로 된 대접을 해야만 하기에 고금도진에 번듯한 충무사를 새로 건립 하는 게 맞아 보인다. 아울러 16세기 한·중 문화 교류를 실증하는 문화유산인 관왕묘를 원형대로 되돌리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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