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바다를 그리워하는 슬픈 눈망울

[완도의 자생 식물] 19. 해국

  • 신복남 기자 sbbn2000@hanmail.net
  • 입력 2017.10.25 08:33
  • 수정 2017.10.25 08:35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다림은 사물을 깊게 보게 한다. 기다림이 가장 가까운 데에서 출발한다. 밤하늘에 별을 보게 하는 데에는 가슴 깊은 곳에서 기다림이 있다는 뜻이다. 가장 작은 풀잎에 이슬방울을 보게 하는 데에도 기다림의 연속이다.

기다림은 기다림을 낳는다. 얼마나 걸었으리라 어느덧 너의 얼굴에 내 가슴을 묻힌다. 그것은 꽃 전체 무더기가 아니었으리라. 나에게 너의 얼굴 하나였다. 그래서 이름 없이 흔들어 대는 너의 품에 안기고 만다. 가장 부드러운 바람이 지나갔다. 사나운 개 짖는 소리도 지나갔다. 여름 지나 가을에 들어서서 철모른 들꽃이 되었다가 차라리 서릿발 속에서 국화꽃 향기가 되고 싶다. 차디찬 돌 틈에서 천년을 기다렸다 핀다. 그러나 기다림은 하루만큼 짧다. 기다림이 많은 사람은 사연이 많은 것일까. 아니다. 꽃이 핀 자리에 다시 생명을 움켜잡듯이 기다림은 한 영혼의 연속이다. 물과 햇빛 그리고 바람이 만나는 순간들이 모여 꽃이 핀다. 스스로 기다림이 만난 결과일 것이다.

10월 중순이 넘어가니 살갗이 거칠게 한다. 점점 낮의 길이가 짧아지면 해국이 핀다. 온도와 햇빛의 양에 따라 꽃피는 시기가 각각 다르다. 시절에 따라 꽃을 피우는 일은 일 년에 단 한 번이다. 그 한번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는다. 사람과 같으면 산고다. 철이 든다는 것은 고통 속에서 무엇인가 깨닫는다는 뜻이다. 해국은 바위틈에서 주로 자란다. 땅이 기름지거나 습한 곳에서는 꽃을 볼 수 없다. 바닷가를 떠나서는 꽃을 피우지 않고 잎만 무성할 뿐이다. 산에서 피는 산국화도 기름진 땅으로 옮겨 심으면 꽃잎이 까칠하게 핀다. 돌 틈에서 비와 이슬만 먹고 산 해국은 강인한 생명력이다.

환경이 열악한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키를 낮춘다. 강한 바람을 견뎌내기 위해 줄기는 유연하면서 질겨야 한다. 이윽고 바위 위에서 꽃이 필 때 모든 고난을 잊을 수 있다. 이런 기다림이 있어 바다는 더욱 아름답게 보일지도 모른다. 땅에서 피는 것과 바위 위에서 피는 것이 사뭇 다르다. 바위 위에서 핀 해국은 훨씬 정갈하고 예쁘다. 삶이 이렇게 역설적일 수가 있을까 싶다. 꽃을 찾는 건 기다림이다. 늘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모든 세계를 아름답게 본다. 해국은 바다를 그리워한다. 바다속에서도 떠나는 물길이 있고 돌아오는 물길도 있다.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생명의 꽃을 피운다. 나 혼자만이 아는 비밀이 있다는 것은 오늘 살아갈 에너지다.
이 비밀이 꽃을 보게 하고 항상 기다림이 있는 사람으로 만든다.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