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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소리 청산구들장농요

[가을특집]가을, 완도 그리고...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7.10.25 08:49
  • 수정 2017.10.25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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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 구들장 논은 청산도민의 혼이 깃들어 있는 문화이다.
척박한 독섬 청산도에는 논이 없어 벼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곳이다. 쌀밥은 명절이나 제사 아니면 먹어보질 못했다.

1516년 제주도에서 이주해온 양씨라는 사람이 고안하여 지금의 구들장 논이 만들어 졌다고 전하고 있다. 지금은 구들장 논이라고 하지만 청산도에서 옛 이름은 “방독논”이다. 제주도에는 아낙네 문화가 유명하다. 그 문화 역시 청산도에서 전래되었다 한다. 아낙네들이 집안을 꾸려가는 문화는 지금은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힘없는 아낙네들이 생활을 꾸려가는 문화는 삶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보전하여야 할 가치가 있는 문화이다. 남정네들은 바다에 고기잡이 나가 죽어 없고, 남아있던 몇 사람 장정은 공부한답시고 방안에서 나오지를 않으니 누가 가정을 책임져야 했을까?  집안에 남아있던 아낙네들이 가정을 꾸려가는 살림살이 문화가 자연스럽게 만들어 진 것이다.

집안에 남자가 있어도 전답일은 부녀자(婦 女子)가 책임지고 꾸려갔던 문화이다. 남정네들은 여름날 그늘에서 팽 팽 자빠져 놀면서도 농사일은 거들떠보지를 않았다. 문화가 그러했기 때문에 별로 색다르게 보는 사람이 없었다. 여자들이 농사일을 하는 것이 보편적인 생활양식이었다.

“속 모르면 청산으로 시집가지 마라.”
“청산여자 가마꼭지 성할 날이 없다.”
따라서 청산 아낙네들은 강인할 수밖에 없었다.“억척스런 청산여자!”
 


청산도 구들장 논도 청산도 아낙네들의 문화이다. 청산도 아낙네들의 애환을 담아 구들장 논 농요를 만들어 보고자 하였다. 노래는 한번 외워두면 가장 오래간다. 그리고 농사일에 힘겨움을 달래기 위해 농요나 민속농악이 만들어 졌다. 구들장 논 민요를 만들어 청산도민의 애환과 역사성을 토대로 청산도민의 특수함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청산 구들장 농요는 곡을 새롭게 창작하여야 한다. 그러나 시간도 없고 예산도 따르질 못해 대중에 익숙한 농부가에 가사를 삽입하고 후렴을 그대로 쓰는 방식으로 만들어 보았다.

"청산도라하는 데는 신선이 사는 곳이라. 무릉도원이라 하였는디."
"산 좋고 물이 좋아 경치만 수려하지, 돌 많고 깔끄막져 나락농사 지을 수 없네"
"삿갓논이 두 배미요, 다랭이 밭이 세배미라. 쟁기질을 해야한디 소를 넣지 못하겠네."
"남편이 쟁기 끌고 아낙이 쟁기 잡고, 빗물 받아 논 채우고 거름 주고 지심 매네. 나락이 영그러져 간다 태풍아 불지마라." 
"나락타작 두 섬 하니 부자가 좇만하다.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네 구들장 논 시절이라."
 


완도에는 마을마다 농악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신세대음악으로 우리의 농악이 없어지고 지금 남아있는 것은 장보고의 “열두군고”만 유지되고 있다. 열두군고도 보전해야하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

그렇지만 각 마을에서 전래되어 오던  농악이 없어지는 것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금번 구들장 논 농요를 구상하면서 구들장 논의 특징을 살리고 아우러진 농악으로 한마당을 만들어 보고자 하였다. 예전에 청산도 농악은 유명했다. 마을마다 특징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월 대보름이나 추석에는 마을마다 농악을 즐기는 바람에 청산도에 농악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원형을 찾을 수 없었다. 다행히 청산도 당리 농악이 최소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여 청산 당리 농악과 완도문화원에서 기르고 있는 청산도 농요를 접목하여 한마당을 만들어 보았다. 당장은 처음이니 만족할 수 없다. 그러나 문화를 만들고 키워간다는 목표만 뚜렷하다면 다음세대에는 “청산도 구들장 농요”가 완도를 대표하는 문화가 될 것이다.

정영래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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