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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헌(弗欺軒) 윤행임 "남을 기만하지 않는다”

[유배 인물]신지 송곡마을과 윤행임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17.11.06 09:37
  • 수정 2017.11.06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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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행임이 유배 온 신지면 송곡마을.


사가살(士可殺) 불가욕(不可辱)이라고 했다. 말인즉슨,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여서는 안된다는 말. 그래서 옛날에 선비를 죽일 때는 능지처참이나 참형이 아닌 사약을 내렸다. 그 만큼 선비들의 염치와 의리를 존중해주라는 뜻이기도 한데, 신지도에 유배 온 인물 중, 사약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신지 송곡마을 할머니들은 시어머니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또 시어머니는 그 시어머니에게서 들었다는데,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약을 받고 죽은 선비를 운상꾼들 13~14명이 메고 가는 것을 보았다며 손자손녀한테 전해 주었단다.

신지도에 유배 온 45명의 선비 중, 유일하게 사약을 받은 이는 불세출의 군신(軍神) 이순신의 이야기를 담은 이충무공전서를 남긴 문헌공 윤행임이다. 윤행임은 영정조시대, 시파(時派)의 중추적인 인물로 열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엄격한 학문적 독려를 받고 자랐다.
학문적 도(道) 또한 궁극에 이르러 선산부사로 있는 장인을 문안하였을 때, 예부터 도깨비가 사람을 괴롭히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윤행임은 글을 지어 잡귀가 물러가기를 빌었더니 이후부터 괴변이 끊기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

정조대왕의 오른팔이 정약용이라면 왼팔이 윤행임이라고 불릴만큼 정조대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며 당대엔 정약용보다 더 높이 평가됐다고. 정조대왕은 세종대에 이어 제2의 조선부흥기를 열었을만큼 성리학, 문학, 과학, 역학, 풍수, 의학, 음악, 예술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특히 역사를 바로 세우는데 앞장 서 세계해전사의 불세출의 명장인 이순신에 심취했는데, 이순신이 남긴 1592년 1월1일부터 1598년 11월17일 노량해전이 일어나기까지 2539일의 기록을 중심으로 이순신과 관련한 다양한 내용을 담은 이충무공전서를 남기고자 했다. 하지만 조선이란 나라는 문인에게는 문집을 편찬해 주었지만 무인에게는 문집을 편찬해 준 예가 없었다. 문인들이 `법도에도 없이 무인에게 나라에서 문집을 편찬해 줄 수 없다`며 극구 반대를 했지만, 정조는 "나라를 위하는데 문신이며 무인이 어디 있는가? 이순신은 조선에서 가장 위대한 신하였다. 문집을 편찬 해 주겠다. 여러 말 마라"며 일침을 가 한다. 그렇게 해 만들어진 문집이 `이충무공전서`다.
 

이순신의 문집 `이충무공전서`가 편찬될 당시 편집의 책임을 맡았던 이가 바로 유득공과 윤행임이었고, 난중일기라는 이름도 이들에 의해서였다.

사실, 정조는 단순한 임금이 아니었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도 다정한 벗처럼 농담을 즐겼는데 한번은 수원화성의 능행을 하다가 밭가운데 돌담을 보고서 "저것이 무엇이냐?"고 윤행임에게 물었다.
이에 윤행임은 "돌담이옵니다."
정조가 다시 묻기를 "그러면, 돌담이면 왜? 돌지를 않는고"
이에 윤행임은 "돌밑에 밭이 받치고 있기 때문에 돌지를 못합니다"고 하자, 그 말에 호탕하게 웃는 정조와 엷은 미소를 띄우는 윤행임. 수어지교(水魚之交)란 이런 말이다. 물고기가 물을 얻고, 바람과 구름이 만나 백성에게 가장 이로운 단비를 뿌렸으니, 백성들의 삶이란 평안이 깃들 수밖에...

하지만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등극하자 수렴청정을 한 정순왕후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정조 시절 느슨했던 천주교신자들을 박해한 사건이었다. 다산 정약용이 그랬듯 윤행임 또한 임시발 괴서사건으로 유배지 지금의 신지면에서 39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명동성당터는 서학을 했다는 이유로 사사된, 말하자면 순교자 윤행임의 집터이다. 순교자의 집터에 성당을 지은 것이다. / 사진. 한겨레


윤행임은 신지 송곡에서 유배온지 4개월만에 석재별고(碩齋別稿) 23권을 집필했다.
특히 1권, 2권은 신지도와 관련된 내용의 글이라고 하는데, 천재들이 꿈꾸었던 이데아 조선을 더 이상 그리지 못한 아쉬움과 그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가 죽기 전까지 거쳐했던 곳은 자신의 당호였던 불기헌(弗欺軒)이다. 남을 속이지 않는다는 이 말은 “알면서도 배우지 않는 것도 기만이요, 배우고도 힘써 행하지 않는 것도 기만이다. 누구를 기만하는 것이냐 하면 마음을 기만하고, 하늘을 기만하며, 선왕을 기만하는 것이다”라는 선비의 도를 실천궁행으로써 보여줬다 할만하다.

비록 그와 그를 죽인 이들 모두 떠났지만 그의 시는 남아 오늘날까지 유배의 고독을 전한다.

남쪽 땅 비바람이 부는 밤에
등불은 석류를 앞에 넣은 듯
슬프구나,
땅을 치며 울부짓다
멍하니 하늘 엎어진 것 슬퍼하네
옛추억 아직도 가없이 어루만지니
좌우로 오가면서
몸 둘 곳 모르겠네
흐느끼다 다시금 통곡하는 몸
외롭게 배 한 척이
바다에 떠 있는 격이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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