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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엔 없는 임진왜란 때 대장군전

배철지 / 시인. 향토사학자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7.11.24 13:49
  • 수정 2017.11.24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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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지 / 시인. 향토사학자

올해 여름에 국립진주박물관에서는 정유재란 7주갑(420년)을 맞아 7월 25일 개막하는 특별전 '정유재란 1597'에서 대장군전을 전시했다. 이 대장군전은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왜장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1542∼1600)’가 전쟁 중에 자신들의 배에 박힌 것을 거두어 대대로 보관해오다가 그의 후손인 ‘구키 다카쿠니(九鬼隆訓)’ 씨의 협조를 얻어 전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 대장군전이 특이한 점이 있었으니 몸통 중간 부분에 해서로 새겨진 '가리포 상 김등 조(加里浦 上 金等 造)'라는 문구가 그것이다. 이 문구는 ‘가리포에서 진상하였는데 김씨 등이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 확실한 문구로 보면 가리포진은 유사시 방어와 공격의 업무만 했던 게 아니라 무기를 제작하는 병기창도 존재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곳 완도는 대장군전을 만들 재료가 많은 곳이다.

조선왕조실록 중 정조실록 41권, 정조 18년 12월 25일 무인 3번째 기록에 의하면 호남 위유사 서영보가 별단을 올렸는데 그 내용 중 완도에 관한 내용이 보인다.………길고 곧은 나무는 반드시 쓸만한 재목이고 가서목(哥舒木)은 더욱이 단단하고 질긴 좋은 재목으로서 군기(軍器)의 중요한 수요인데 유독 이 섬에서만 생산됩니다. 그러니 이것은 모두 토산물 중의 기이한 보물입니다.……… . 여기에 나오는 가서목은 가시나무의 한자말이고 군기는 군사 무기를 말하니 병기창의 역사도 임진왜란 때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계속 유지 되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시나무는 어떤 무기 제작에 사용 되었을까? 여러 기록을 살피면 대장군전이나 장군전 같은 화포에 사용되는 전(箭)류의 몸통 부분이 이에 해당하며 창의 자루에도 사용되었다.

그런데 가시나무도 여러 종인데 과연 어느 종류가 사용되었을까? 완도에 자생하는 가시나무는 참가시나무, 종가시나무, 붉가시나무 등이다. 나무는 일반적으로 무거운 나무가 단단하기 때문에 비중이 단단함을 따지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일반적인 가시나무의 기건비중이 0.9이고 붉가시나무의 기건비중은 0.9~1.05로 가시나무 종류 중 가장 단단하다. 그래서 화약의 폭발에도 쪼개지지 않아야하는 대장군전이나 장군전에는 붉가시나무가, 단단함은 덜해도 탄성이 좋아야하는 창의 손잡이에는 종가시나무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사정이 이렇고 보니 전시와 더불어 실체를 확인한 대장군전은 나라의 보물이기도 하지만, 실로 가리포진의 존재 이유가 되었던 점을 확인할 수 있는 완도의 보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제 전시가 끝난 대장군전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니 그 실물은 이 나라에 없는 셈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나서서 복원해야만 할 것이라 생각하고 몇 달을 기다렸는데도 완도문화원에서 복원해야 한다는 말이 잠시 오갔을 뿐 구체적으로 복원한다는 계획도, 한다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마침 실측도가 구해졌고, 사정을 이해한 완도수목원의 오득실 원장이 베어서 두해 이상이 지난 붉가시나무 한 주를 제공했다. 그리고 글쓴이가 목공 작업을 한 기간이 10여년이니 복원은 충분히 가능하다 여겨져 작업을 시작하였고 이제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물론 이 복원 작업을 개인적인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기록은 이런 단초가 제공 되었을 때 하나하나 해두어야만 하고, 그런 집적물이 쌓여서야 온전한 역사의 복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또 한 대장군전을 만든 김씨 등과 같이 이름도 남기지 못한 민중들의 역사도 함께 복원될 것이니 거기에 큰 의미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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