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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우 흩날릴제, 매창을 만나고

[문학의 향기]교산과 매창의 사랑 4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17.12.01 21:08
  • 수정 2017.12.01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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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당과 가장 친분이 두터웠던 허균. 그가 쓴 석장비문을 보면 임진왜란 당시 서생포 왜성에서 가토 기요마사와 사명당이 나눈 일화가 전하고 있다.
사명당과 마주한 가토.“너희 조선에는 보배가 있느냐?”
이에 사명당은 “우리나라에는 보배가 없다. 보배는 일본에 있다"
그러자 가토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되묻는다.
사명당은 “우리나라에서는 네 머리를 보배로 알고 있다. 그러니 보배는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냐?”
조롱하는 말에 다시 조롱으로 답하는 우문의 현답같은 말. 이에 가토는 놀라서 탄복을 했다.
이런 일화 때문에 일본에서 사명당은 설보화상(說寶和尙) 즉 보배를 말한 스님이라는 뜻으로 불렸는데, 보통사람의 배짱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답.
사명당은 밀양의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어린시절부터 유학보다 불교에 뜻을 두었다. 15살 때 소년시 장원을 했지만, 유학보다는 부처의 말이 더 깊이가 있고, 철학적이다 판단해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한다. 사명당은 임진왜란 후 왜와의 강화를 위해 사신으로 임명받고 왜국으로 건너가 그들의 항복을 받아내는 한편 잡혀간 3,500여 명의 포로를 데리고 귀국하였다.
사명당은 허균의 둘째의 형과는 어릴 때부터 글벗이었고 허균은 이러한 사명당을 친형처럼 따랐다.
사명당은 늘 결기가 살아 있던 허균에 대해“남의 잘잘못을 말하지 말게나. 이로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재앙까지 불러온다네”라며 조언했지만 허균은 그걸 지키지 못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세기의 만남.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지/천리(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도다”
이화우 매창의 첫 만남.
1601년 7월 23일 비오는 날에 허균은 조운판관이란 직책으로 전북 부안에 들렸을 때였다.
천하의 한량인 허균이 부안명기 매창에게 홀딱 반한 건 그녀의 미모가 아니라 그녀의 재능이었다.
시를 짓고 거문고타는 매창에 빠져들어 밤을 새운 허균.
매창은 1573년(선조 6년) 부안현의 아전의 서녀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었기에 계생(癸生), 또는 계랑(癸娘)이라 하였으며, 향금(香今)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기생이 되어 그는 천향(天香)이라는 자와 매창(梅窓)이라는 호까지. 조선시대 여성들에게는 이름이 없었지만 이러한 시대에 이름, 자, 호까지 지니며 살았던 매향.(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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