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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귀한디 무려 세 개나 있지 않은가?

[독자 기고]이승창 / 전. 완도어촌민속전시관 관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7.12.01 21:12
  • 수정 2017.12.01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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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창 / 전. 완도어촌민속전시관 관장

섬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오랜 숙원은 육지와의 왕래가 원활하게 되는 것이다. 요즘은 차를 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철부선들이 사람들을 실어나르고 있어 예전에 비해서는 운송수단이 많이 편리해졌다.

필자의 공무원 시절 첫 근무지는 지리산 아래 조그만 면사무소였다. 그곳에서 근무하다가 완도군청으로 발령받고 처음 평일도에 발을 디뎠던 때는 1984년 2월이었다. 발령지로 가기 위해 완도항에서 목선을 타고 두 시간을 넘게 항해해서 금일읍의 관문인 하화전항에 도착했는데, 여객선은 선착장에 바로 접안하지 못하고 쪽배만한 종선으로 옮겨 타고서야 선착장에 내릴 수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섬과 섬을 잇는 다리를 차로 건너서 섬에 들어간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같은 얘기였던 시절이 있었다.

산업화가 본격화되고 나라의 경제가 발전하면서 정부는 섬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게 됐다. 1980년대 후반에 도서개발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선착장‧호안도로 개설 등 섬을 개발하는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육지와 섬을 연결하거나 섬과 섬을 연결하는 대규모 연육‧연도공사는 재정이 열악한 지방자치단체의 자체 힘만으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섬이었던 완도를 육지인 해남과 연결시킨 완도대교가 건설됐던 때가 1969년이었고(지금의 신완도대교가 개통된 것은 2013년 3월이었다), 완도와 신지도를 잇는 신지대교가 준공된 때는 2005년이었으니 많은 돈이 들어가는 다리를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 완도~신지도~고금도 도로 구간이 국도 제77호선으로 지정된 후에 고금도와 강진 마량을 잇는 고금대교가 정부의 예산지원을 받아 2007년에 준공됐고, 신지도와 고금도를 연결하는 장보고대교가 드디어 지난 11월 28일 개통되어 이제는 배를 타지 않고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완도읍을 중심으로 완도군의 동부권이 약산대교(조약도~고금도), 신지대교(완도~신지도), 고금대교(강진군 마량면~고금도)와 이번에 준공된 장보고대교 등 4개 다리로 모두 연결되었다. 이제 고금도는 신지면‧완도읍과 약산면‧금일읍‧생일면‧금당면 등 6개 읍면을 연결하고 있고, 강진군과 장흥군 등으로 가는 완도 동부권 교통의 요충지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편리한 교통망이 구축되어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있을 것이고 원활한 물류수송이 이루어지면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필자가 오래 전에 방문했던 독일 라인강 옆의 해발 193m에 불과한 로렐라이 언덕에 있는 ‘로렐라이 마녀상’은 평범한 조각상일 뿐인데 아름다운 전설을 만들어서 유명세를 타고 세계 각국의 관광객이 몰려드는 것을 알고 깜작 놀랐던 적이 있다. 가까운 여수시는 연간 천 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고 있는데, ‘여수밤바다’라는 노래 한 곡이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의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는 매개체가 됐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를 만드는 것이 엄청난 예산이 들어가는 토목공사라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고금도는 무려 세 개나 되는 연육교와 연도교를 갖고 있다. 모르긴 해도 아마 이 기록은 우리나라의 유일무이한 기록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기록을 기네스북에 등재하는 절차를 밟는 등 세상에 널리 알려서 고금도와 완도군의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제안을 해본다.

헛된 꿈이라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서 “지금 신하에게는 아직도 열 두 척의 전선이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라고 외쳤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섬과 육지를 연결하고 섬과 섬을 이어주는 아름다운 다리가 무려 세 개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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