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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역사의 소외 또한 적폐다

[특별 기고]정영래 / 완도문화원 원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8.02.14 20:47
  • 수정 2018.02.14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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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래 / 완도문화원 원장

호남은 역사 소외 적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1천 5백년을 살아왔던 고장이다.
660년 백제의 억울한 멸망에서부터 841년 장보고의 정치적 시해사건으로 멀정한 위인을 역모로 몰아 1.200년 동안 묶어놓았다. 그리고 장보고는 지금도 확실히 복원이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장보고의 고장 청해진, 완도는 진보와 개혁세력의 시발점이다.

완도는 조선후기 유배지로 명성이 높았던 곳이다. 고금도과 신지도에 약 300여명의 유배인이 귀양살이를 하였으며 주로 노론 보수세력에 의해 유배 되었던 남인과 소론인물들로 진보와 계화세력이 대부분이다.

1650년경 보길도에서 어부사시사를 창작하였던 고산윤선도는 서인세력에 몰려 조정에 출사하였다가 버티지 못하고 보길도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남인으로서 진보의 어려운길을 걸었다. 자신을 표현했던 글이 있다. “물가에 외로운 솔”

임진전쟁이 끝나고 서서히 진보세력과 보수세력간에 싸움이 시작되었다. 보수세력은 주로 벼슬을 하였던 양반세력이고 진보세력은 서얼출신 및 사림에서 글공부만 하였던 인물들이었다. 이것이 당파싸움으로 번지면서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1700년대 성리학과 양명학이 대두되면서 보수세력의 성리학자들은 진보세력의 양명학자들을“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하여 죽임을 당하고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이 영조대 양명학의 거두 원교 이광사이다. 그리고 정조와 가장 가까웠던 규장각 총 책임자 석재 윤행임은 노비혁파를 주장하다가 신지도에 유배되어 사사되었다. 이 사람들은 진보의 급진세력으로 보수에 의해  신지도에서 생을 마감한 인물들이다.

조선조 말기 고종대 시조의 대가 경평군 이세보. 한국 신 의학의 선구자 송촌 지석영. 완도를 만들었던 심재 이도재. 이분들은 조선 역사에서 급진개화세력이었다. 그리고 완도주민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다. 그 결과 1905년부터 완도에서는 항일운동이 시작되어 전국 항일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1926년 일제의 억압이 절정에 이른 시기 광주에서 봉기하였던 광주학생운동에서는 장석천, 임재갑 등을 비롯하여 완도학생들이 광주학생운동을 주도 하였다.

그 후 1945년 해방이 되었다.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면서 독재정권에 맡서는 저항운동이 시작되었다. 1950년경 완도군 3대 국회의원 김선태는 대한민국 민주화에 선두주자였다. 그리고 민주화운동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완도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민주화 운동은 1980년 광주에서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저항운동으로 승화되었다. 지금에 이르러 인적 민주화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 적폐는 아직 거론도 못하고 있다. 

호남 그리고 완도는 역사의 억울함을 안고 적폐 속에서 1천400년을 살아왔다. 400년 전 호남의 임진왜란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

임진왜란은 조선역사에서 가장 힘들었던 전쟁의 역사이다.
“湖南國家之報障 若無湖南 是無國家”

임진전쟁의 결과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전쟁을 마무리 하였던 곳은 호남과 완도이다. 그러나 호남과 완도(고금도통제영)는 임진전쟁사에 없다. 이순신 역사를 가지고 지금 것 원 없이 우려먹은 곳은 경상도지역이다. 임진전쟁의 역사에서 경상도 지역은 단지 전쟁터였을 뿐 전쟁을 수행하였던 수군병력과 장비는 거의 호남 즉 전라도에서 이루어 졌다.

이것이 역사의 적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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