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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학은 가리포왜변 활약에 힘입어 계향을 만나고...

[완도읍 특집] 1. 가리포신궁 이봉학과 기생 계향이 이야기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18.04.06 10:26
  • 수정 2018.04.08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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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5년 5월 11일, 왜인은 70여 척에 분승하여 전라도 남부지역을 급습해 약탈과 살인, 납치를 자행했다.

지금의 완도인 가리포도 예외는 아니었다. 성은 순식간에 뚫리고 왜병들은 물밀 듯이 밀려 들었다. 몇 명의 병졸로는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상태. 이대로 들이 닥친다면 그 누구두 살아 남을 수 없었다. 왜병의 기세에 모두가 공포에 휩싸여 있을 쯤. 어디선가, 세가닥의 빛줄기가 바람을 갈랐다.

핑! 핑! 피윙~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 달려오던 3명의 왜병이 고꾸라졌다.다시 핑! 핑! 핑! 피윙! 4번의 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대로 4명이 쓰러졌다. 그렇게 청아한 파열음이 허공을 가를 때면 어김없이 그 소리만큼 적병들이 쓰러졌는데, 어느 때는 3개를 어느 때는 4개의 화살이 날아갔다.

그 누군가!
꼭 다문 입술은 바위문처럼 굳게 닫혀 있었지만, 그 눈빛은 태산처럼 침착했다. 그 손길은 바람처럼 빨랐으며 화살을 거는 손맵씨는 시원한 바람 한줄기가 수면 위를 미끌어져가듯 가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마치 은빛 고기들이 춤추듯 노닌듯 했다.

그럼에도 노도처럼 밀려드는 왜병들의 기세는 쉽사리 눌리지 않았다. 하지만 활을 거머쥔 자는 한 치의 두려움없이 선봉에 서 화살을 날려 보내니, 쾌활한 잠자리가 물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듯 유려하기만 하였다.

이제는 "핑" 하는 소리에 조선군의 함성 소리가 먼저 들려 왔다. 가리포 병졸들의 함성 소리가 거세질수록 적병들은 추풍낙엽 쓰러져만 갔다. 시간이 흘러 지칠 법도했지만, 화살을 거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마음으로 당기고, 마음으로 쏘는 신기(神氣)의 활솜씨. 이윽고, 어느 순간엔 눈 마저 감은 듯 했다. 눈을 감고 귀를 닫아 더욱 고요한 마음으로 환형처럼 번쩍번쩍 들어치는 빛을 향해 날리는 화살.

혼란한 틈바구니 속에서도 화살은 어김없이 적병들의 머리로 날아 갔고, 살을 맞은 적들은 여지없이 쓰러져 나갔으니... 바로 신기의 활솜씨로 왜적으로부터 가리포를 지켜낸 임꺽정의 아우, 신궁 이봉학이었다. 봉학은 어릴 적부터 애기활을 가지고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결과 애기 활을 만들어 파리까지 잡는 활솜씨를 뽐냈다. 참새의 왼쪽 눈을 겨냥하여 오른눈으로 관통시키는 그야말로 신궁, 이봉학이었다.

그리고 그의 연인 계향. 계향은 조선 명종(1534-1567) 때의 전주 기생으로 춤과 노래에 능하고 의리와 자존심이 매우 강한 당대의 명기였다. 그녀와 함께 술 한 잔이라도 하기 위해 전주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져 사는 다른 지역의 사나이들까지 그녀 곁으로 줄줄이 모여 들었으나 그녀를 차지할 순 없어 속만 태울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봉학이 가리포의 활약에 힘 입어 전라감사의 비장으로 전주에 들었다. 천하명궁으로 이름을 떨친 걸출한 이봉학이었으나 천한 출신으로 주위의 시기를 받게 되었다.
전주 사람들이 이봉학을 골려주고 놀려줄 속셈으로, 평소 귀신이 자주 출몰한다는 방을 그가 하룻밤의 여장을 풀 숙소로 내주었다. 그런 후 계향으로 하여금 한밤 중에 하얀 분을 얼굴과 몸에 바르고 하얀 옷을 입고 머리를 길게 풀어헤친 채 귀신 행세를 하게 해 그 앞에 불쑥 나타나게 했다.

그렇게 하면 이봉학이 깜짝 놀라 기절할 줄 알았던 것인데, 담력이 워낙 컸던 이봉학이라 그러한 얄팍한 술수에 넘어갈 리 없었다. 그날 밤, 힘 세고 머리 좋고 호방한 이봉학에게 그녀는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쇠붙이 마냥 정신없이 푹 빠져들어 버렸다.

얼마 후, 신임사또가 부임해 오고 그는 계향을 보자마자 그 미모에 현혹되어 그녀를 수청 기생으로 삼으려 했으나, 이를 끝까지 거부해 그만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녀가 크게 낙심하고 있을 때, 이봉학은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뚫고 그녀를 구해 멀리 달아났다.

이때부터 두 사람의 우여곡절 많은 인생이 시작되었지만, 그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더욱 깊고도 성숙한 사랑을 다져나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둘은 탄탄하고도 넉넉한 그러면서도 지극히 아름답고 포근한 그런 사랑의 터전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들은 관군에게 쫓겨 급히 도주하던 임꺽정 일행의 도주를 도와 그들 또한 쫓기는 신세가 되어 임꺽정이 본부로 삼고 있는 청석골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그들은 관군에 의해 토벌될 때까지 향기롭고 감미로운 사랑을 청석골에서 쌓아나갔는데, 그녀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이봉학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녀는 죽으면서도 이봉학의 옷을 가슴에 꼬옥 안고서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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