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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 때 더 찬란했던‘현란’당신이 있었기에...

[나의 반쪽]안환옥 독자(완도읍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8.04.07 15:59
  • 수정 2018.04.07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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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릉~“생일면사무소 안환옥입니다.” “안녕하세요! 보길면사무소 김 00인데요. 취로사업에 대해서 여쭤볼게 있어서요.”

아주 옛띤 목소리.
신규 발령을 받은 여직원으로 보길면사무소 직원 분이 생일면에 근무하는 나한테 물어보라고 해서 전화했다고 말했다.(생일면에 근무하기 전에 보길면에서 근무했었다.)
난, 직장동료로서 업무를 성실히 알려주고, 업무상 몇 번의 통화를 했었다.
그리고 합동집무(예전에는 군청에서 12개읍면 직원들을 상군승인해서 일정 장소에 모여 군 집계를 냈음)가 있어서 그곳에서 전화통화만 했던 보길면 여직원을 처음 만났다.

처음 본 그녀의 얼굴은 오동통한 이쁜 얼굴에 머리는 파마를 했었다.(짐작해보면, 그녀는 여고생의 모습을 벗어나려는 모습이 역력히 보였다. 하하)
그녀는 합동집무를 하는 중에도 나에게 업무와 관련한 많은 일들을 물어보았다. 합동집무를 무사히 끝마치고 각자 근무지로 갔다. 서로 얼굴을 보고 난 후라, 이제는 통화하는게 그리 서먹하지 않아 밤에도 전화를 하게됐다.

그녀의 아름다운 이름은 김현란. 그때 그녀는‘직원회식 자리에 가야되는 건지? 노래방에도 가야 되는건지?’ 어떻게 하는게 옳은 것인지를 물어왔을 정도로 순수했다. 한 번 만났으면 싶은데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봤다. "우리, 주말에 무등산에서 만나면 어떨까요?"했더니 그러자고 했다.

그때만해도 내성적이라 말도 잘 못해 생일도 친구를 데리고 함께 나갔다. 무등산 계곡 위 평상에 앉아 셋이서 닭백숙을 먹었었는데, 난 별로 말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첫 데이트에 다른 남자를 데리고 나간 사람은 나 밖에 없을 듯~ 하하)

그 후 수시로 통화를 하게되었지만 직원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자주 만날 수는 없었다.
마침 방송통신대를 같이 다니게 되어 해남지역 학습관 동아리 활동으로 해남, 진도를 왕래하면서 몰래 데이트를 했다.
사귀는 것을 안들키려고 각종 게임에서 서로 다른팀으로 뛰었던 기억.(그때 들러리 해준 학우들에게 감사하고 미안합니다~)

우리는 보고싶어도 만날 수가 없어 전화통화를 자주했다. 군청에 전입했을 때 어떤 날은 퇴근 후 통화를 4~5시간 정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교환원이 통화중에 끼어들었다.
교환원은 "급하게 다른 분이 통화를 원한다고 하니 끊고 다시하시면 어떨까요?"고 말해 그 순간 얼마나 당황스럽고 황당했던지.(그때 울 형님이었다. 하하)

장인어른을 처음 뵙던 날. 그녀는 아버지께서 너무 엄격하시다고 나에게 겁을 줬었다. 잔뜩 긴장하고 인사를 드렸는데 몇가지 물어보시고선 그냥 웃으셨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자상하신데 왜 거짓말 했냐”고 했더니, “언니 3명 모두 형부들을 데려와서 혼났다.”고 말했다.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고 우리는 1995년 2월 결혼을 했다. 장인어른은 우리 결혼 후 6개월만에 돌아가셨다. 결혼식을 할 때까지 본인의 병을 알리지 않았던 것이었는데, 유독 장인어른의 사랑을 듬뿍 받은 와이프는 슬픔을 금치 못했다.(여자들은 깜짝 놀라면서 ‘엄마야’를 외치는데, 와이프는 ‘아빠야’라고 할 정도였다.)

맞벌이 부부의 생활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젊은 나는 친구들도 만나고 상사도 모셔야 된다며 신혼초 밖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와이프는 혼자 애를 보고 키우면서 많이 힘들어 했다.(그땐 신혼초에 각시한테 잡히면 안된다는 선배들의 말에 속아서~ 하하)
서로 힘들다고 이해할 수 없다면서 많이 부딪히기도 했다.

2002년 4월 6살 딸, 2살 아들을 아내에게 맡기고 난 보길도로 발령이 났다. 도저히 육아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와이프가 육아휴직을 결심했다.(완도군청 1호 육아휴직이었던 것 같다)
나는 와이프에게 미안하고 고마울뿐이었다.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 준 것이다. 그때 휴직으로 인해 직장에서 승진은 늦어졌지만, 돌이켜보면 그녀로 인해 아들, 딸이 건강하게 잘 자랐다. 또한 무등아파트 부녀회원들과 맺은 깊은 관계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아무튼 이 기회를 통해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2년간의 보길도 생활을 마치고 2004년 4월 군청으로 입성했는데, 와이프는 청소 한 번 해보라고 시키면서 밥은 어떻게 한다고 알려줬다. 다음은 설거지, 그 다음은 빨래하는 것 등 집안일들을 하나하나 가르쳐 줬다.

애들 키우느라 고생했으니 당연히 내가 해야지 했는데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다음 와이프는 항상 일이 많은 행정계에서 밤낮없이 일에 매진하고, 몇 개부서를 거친뒤  승진을 했다. 와이프가 딸 고2때 1년동안 매주 토요일 광주를 올라가서 뒷바라지를 해주는 것을 보고 나는 적잖이 놀랐다.

한번 마음먹으면 하고야 마는 똑부러진 성격탓에 애들은 겉으론 무서워하지만 마음만은 항상 고마워하고 있다. 최근 몸상태가 안좋다고 하더니만 약을 먹고 조금 나아진 것 같았는데 어깨가 아프단다. 애들 어렸을 때 힘들어서 그런 것인지? 아님 스트레스 인지?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왠지 미안한 감이 든다. 이제 애들이 커서 여름휴가를 같이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둘만이라도 해외여행을 다니자며 지난해 중국 장가계를 갔다왔다. “여보! 올해는 어디로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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