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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도에는 아직도 이순신이 살아 있다

[완도 시론] 정현창 / 문화재학 박사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8.04.28 18:22
  • 수정 2018.04.28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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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창 / 문화재학 박사

조선시대 고금도를 비롯한  완도 일대는 왜구의 주요 침탈의 거점이었다. 이는 바로 완도 일원이 약탈할 자원이 산재하여 있는 활용가치가 높은 곳이라는 의미이다. 이 자원으로 인하여 많은 수군군수품을 조달하는 기지창이었으며, 평화 시에는 궁방의 자원 수탈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현재에도 수많은 육・해상 자원으로 그 미래가치가 높은 곳이다.

이순신은 칠천량에서 무너진 조선수군의 자존심을 회복한 명량해전 이후 고하도에서 숨을 고른 후 본격적으로 고금도에 수군 진영을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고금도는 임란 중에 이순신에 의하여 설진된 마지막 통제영이었다. 고금도는 무술년 고흥 일대에서 벌인 절이도해전을 비롯하여 순천 예교성전투와 노량해전을 치르면서 임진왜란을 종식시킨 조명연합수군기지였다.
근년까지도 이곳 고금도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사적지 종합개발을 위한 추가적 계획도 수립되고 있다. 완도관광의 미래 청사진을 제시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명 수군의 주둔지였던 묘당도는 진린에 의하여 설치된 관왕묘가 있는 곳이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 통제사 및 등자룡 총병의 시신들이 안치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사적 제114호로 지정되어 이순신 관련 사적지의 하나로 그 위상을 높이고 있어 수많은 이들의 추모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돌이켜보면, 이순신은 가리포첨사 발령을 완도와의 첫 인연으로 시작하여, 통제사가 되어 순시로 남도 한 바퀴를 돌 적에 가리포에 들렀으며, 결국에는 고금도 덕동에 통제영을 세우고 국가의 미래의 안위를 위하여 생의 마지막을 불태웠다. 이순신은 관음포에서 마지막 숨을 쉬셨다. 그리고서 고금도로 돌아와 숨도 안 쉬고 두 눈 크게 뜨고 살아계신다. 충무공은 가끔 달빛 환히 부서지는 밤이면, 거울같은 바다물결에 마음을 빼앗기던 한없이 시적이고 여린 마음을 가진 분이었음을 일기로 적었다.

그런 이순신이기에 묘당도 솔숲 사이로 쏟아지는 달빛이 그리워 월송대에 돌아오셨다. 지금도 이순신은 밤이면 월송대에 누워서 솔가지 사이로 내비친 달빛 구경하면서 편안히 쉬다가, 달이 넘어가고 동녘이 환해지면 묘당도 충무사에 좌정하여 그윽하고 인자한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신다.

미래의 밝은 비젼은 과거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세워질 수 있는 것이다. 완도에는 해상의 두 영웅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바로 장보고와 이순신이다. 수년간에 걸쳐 장보고의 역사적 조명이 이루어져 왔다. 또한 많은 사적이 복원 설립되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이순신 밸트가 조명되고 있는 중이다. 이제 장보고의 뒤를 이은 이순신이 더욱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시기로 여겨진다.

이제 꽃샘추위도 가고 화란춘성한 시절이다. 잠시 바쁜 일손을 놓아보자.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고 옷깃을 여미어 고금도로 발걸음을 옮겨 보자. 바로 그곳에는 이순신이 살아 계심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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