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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보의 절창, 십리 고운 모래밭을 울리니

[신지면 특집 1] 조선 시조의 대가 이세보와 명사십리 이야기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18.04.29 21:44
  • 수정 2018.04.29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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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 명사갯길에 핀 자란(紫蘭) / 사진. 이승창 님 제공


윤선도, 박인로와 함께 조선의 3대 시인으로 손꼽히는 송강(松江) 정철(鄭徹).
송강이 강계기생 진옥(眞玉)과 주고받은 화답시를 보면, 그 표현이 상당히 적나라하다.

옥(玉)이 옥(玉)이라거늘
번옥(燔玉)만 옥이라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일세
분명하다 나에게 살송곳 있으니
어디 뚫어볼까 하노라.

대학자이자 일국의 재상을 지냈으며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 등 불후의 명곡을 남긴 송강이 여자의 성기를 옥으로 표현하면서 자신의 성기를 살송곳이라 표현하는 참으로 노골적이고 파격적인 시 한 수를 진옥 앞에 내놓았다.
이것은 그를 받아들일만한 적수를 만났다는 이야기다.

이어지는 진옥의 화답.

철(鐵)이 철(鐵)이라 했거늘
섭철(攝鐵)로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正鐵)일세
분명하다 나에게 풀무가 있으니
어디 한 번 녹여 볼까 하노라.

철을 남성의 성기로, 풀무를 여성의 성기로 비유해 그 철을 녹여버리겠다는 진옥의 화답시. 이 시를 받은 정철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대문장가인 송강의 시조에 즉답을 했으니 그야말로 용호상박에 부창부수라!
누가 승이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한 판.

그날 밤, 이들은 대장간의 용광로보다도 더 뜨거운 밤을 보냈을 것이다. 노골적이지만 전혀 상스럽지 않는 아름다운 시(詩).

단 한 줄의 시에서 서로의 전생애를 드러내고 또 이를 서로 알아보는 힘, 궁극의 이심전심을 보여주고 있는데, 시조의 대가라고 하는 이세보 또한 이들의 화답시를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백련철(百鍊鐵)도 녹이고
진옥(眞玉)도 뚫건만
내 가슴에 맺힌 한은
무엇해서 못 통하니
아마도 님 그리움이라 못 뚫는가! 
 
음미해보면 상스럽다기 보단 참으로 아릅답다. 백번을 달구어 두들긴 쇠도 뚫고 단단한 진옥도 뚫을 수 있는 정력이 있지만, 내 가슴에 맺힌 님을 향한 그리움은 그것은 무엇으로도 뚫지 못한다는 절창.

한 수 더 감상해 보면...

오늘 가도 이별이요
내일 가도 이별이라
오늘 가나 내일 가나
이별은 같건마는
아마도 하루나 더 묵으면
훗 기약이나마!

이 시 또한 너무나 쉽게 읽히지만, 되뇌이면 되뇌일수록 깊은 울림이 있다.
혹시나 하는 기대. 하룻밤 더 있으면 다시 만날 약속이라도 받아낼 줄 알았을까? 아님 다시 만나는 게 쉽게 않아 헤어지면 영영 이별이라! 하룻밤만 더 있어준다면 같은 이별일지라도 하루 더 머물러 같이한다는 그 자체가 무엇보다 소중한 것일까!

역시 이 시조의 주인공 또한 이세보다.

이세보는 선조의 9대손이며 철종의 사촌 아우다. 1860년 29세 때 안동 김씨들의 횡포를 비난했다가 외척의 전횡을 입에 올리고 관료사회의 부정부패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이곳 신지도로 유배 왔다. 권력의 중심에서 가장 밑바닥으로 추락한다면 그 설움과 울분은 어떠했을까!
그가 찾은 곳이 바로 명사십리였다.

전국의 내놓으라 하는 이름난 해변이 고운 모래밭 십리길이란 뜻에서 한결같이 명사십리(明沙十里)를 쓰고 있지만, 신지의 명사십리(鳴沙十理)만큼은 울 명(鳴)자를 쓰고 있는데, 이유인즉!
이세보가 명사십리의 고운 모래톱에 시를 쓰고 읊기를 그 소리가 마치 울음소리 같았다고 해 주민들은 이 고운 해변에다 ‘울음’이라는 이름을 걸어줬다. 이세보는 신지 송곡에서 3년 동안 위리안치(圍籬安置) 됐는데 이곳에서 77수의 시조를 남겼다. 

"왼손에 잡은 봄빛(모종) 오른손으로 옮겨 내어 농부가 흥에 겨워 물이 찬 논에 모종을 옮겨 심으니 아마도 태평한 세상에서의 즐거워하는 백성뿐인가!"하는 농부가부터,

가슴의 불이 나니 애간장이 다 타네
인간의 물로 못 끄는 불 없건마는
내 가슴 태우는 일은 물로도 어이 못 끌까!
나날이 다달이 운우지락에 사랑하며
산골짝 맑은 물이 증인 되고
천년 만년이자 맹세 했것만
못 보아도 병, 더디 와도 애가 끓는구나!
                                                      -  상사별곡(相思別曲) 

4백59수의 시조를 남겼다.
시간은 독점 될 수 없다. 소유 될 수 없기에 인간을 넘어선다. 하지만 깨달은 몇몇은 그 시간을 멈춰 세우기 위해 전 생애의 걸친 실존의 에너지를 한 순간에 퍼붓는다.
공간을 초월해 공간이 사라지는 순간, 시간마저 초월할 것이란 확신으로...

당신을 사랑하기에 난, 이 세상 가장 강력한 화살 하나를 재워 당신의 붉은심장을 향해 간절함으로 당겨 절박함으로 놓는다. 화살이 당신의 붉은심장을 관통할 때 붉은선혈이 낭자하면 그곳에선 붉은피를 먹고 자란 고결한 꽃 한 송이가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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