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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배기록 40회, 유배 온 인물은 45명

[신지면 특집 3] 신지도 유배인물사와 문학공원 조성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8.04.29 22:42
  • 수정 2018.05.01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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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의 유배이야기 / 도서출판 리젬

조선은 명나라 법률에 근거하여 3천리 유배를 실시했는데 땅덩어리가 좁아 3천리 유배를 실시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고안한 것이 바다를 한번 건너면 천리를 쳐주어 고금도는 2천리, 신지도는 3천리 유배로 가장 절해고도로 쳤다.

신지도나 고금도의 유배는 천국이었다. 지역주민들이 협심하여 먹여 살리고 서당까지 열어 소일거리를 제공했다. 원교 이광사의 경우 신지도에서 황치곤씨가 스스로 보수주인을 자처하여 원교가 편하게 서예활동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고금도는 ‘용지정사’라는 사옥을 따로 제공하여 유배인을 모시는 문화가 있었다. 신지도 유배인들은 생활이 안정되면서 서당을 열어 한양의 학문과 정신문화를 가르쳐 주었다.

<조선왕조실록> 등 관찬 사서류에서 확인되는 것이 38회, 개인 기록에서 확인되는 것이 2회로, 신지도의 유배기록은 모두 40회가 확인된다. 개인기록은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와 이세보의 <신도일록(薪島日錄)>이다. 그리고 유배된 인원은 45명이다. 유배의 사유는 갑술옥사, 을해옥사, 신유사옥, 당론 등 정치적인 이유가 가장 많고 탐학이나 부정, 도적, 살인 등과 연관된 내용도 있다.
 

사진 / 문화일보

신지도 유배인물 가운데 기록상으로 처음 확인되는 인물은 목내선(1617~1704)으로 1694년(숙종 20) 4월에 유배돼 1699년(숙종 25) 2월에 풀려 난다. 목내선을 신지도로 데려오는 금부도사 임방이 “신지도에서 배를 띄우고(智島放舟)”라는 제목으로 5수의 신지도 관련 시를 남기는데 신지도에 관련된 초기 제영(題詠, 제목을 붙여 시를 읊음. 또는 그런 시가)이다.

신지도에서의 행적이나 기록이 드러나는 유배 인물로는 정호(1648~1736), 김성탁(1684~1747), 이광사(1705~1777), 윤행임(1762~1801), 이세보(1762~1801) 등이다.

정호는 송강 정철의 현손으로 ‘지도의 위리안에서(智島棘中, 지도극중)’라는 오언절구 시를 남긴다. 신지도 유배인으로서 확안되는 첫 번째 시이다.

김성탁은 신지도에 있을 때 큰 아들 구사당 김낙행과 작은 아들 김제행에게 보낸 글과 시 2편이 문집인 <제산집>에 남아 있다.

이광사는 동국진체의 서예대가로서 명망이 있었으며, 서법 이론서인 <서결(書訣)>을 신지도에서 지은 인물이다. 시도 남아 있으며 아들인 이영익이 신지도 석굴을 유람한 기문과 신지도 사람 이상관에게 주는 글이 남아 있다. 이광사의 글씨는 서남해안 일대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이광사가 신지도에서 세상을 뜬지 14년 뒤에 강진으로 유배를 온 다산 정약용의 <탐진 풍속 노래> 가운데 “글시방이 옛날에 신지도에 열려 있어 아전들 모두가 이광사에게 배웠다네”라는 시를 통해서 서남해안의 아전들에게까지 이광사의 글씨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윤행임은 신유옥사로 인해 유배돼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다(弗欺吾心)’는 뜻에서 자신의 거처를 불기헌(弗欺軒)이라 하면서 ‘불기암기’를 짓고 저술에 몰입한다. <석재별고(碩齋別稿)>로 남은 신지도에서의 저술은 시 124수, <신지도기>와 <마도기> 등의 기문과 비문, 서문, 그리고 10책(21권)의 사서오경(四書五經) 주석서이다. 윤행임의 저술은 같은 시기에 유사한 정국 동향으로 장기를 거쳐 강진에 유배돼 저술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의 저술과 비교할만한 가치를 지닌다. 자세한 분석과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석재별고>는 “신지도에서 보고 듣는 데로 쓴 글”이라는 의미로 <신호수필(薪湖隨筆)>이라고 했다. 윤행임은 유배에서 풀리지 못하고 5개월여 만에 유배지인 신지도에서 사사되고 만다.

이세보는 안동김씨 세도 정치하에서 신지도로 유배된 인물이다. 이세보는 460여수의 시조를 지은 문학인으로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시조를 많이 지은 작가이다. 많은 부분이 신지도 유배기간 중에 지어졌다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신도일록>을 남김으로서 그의 유배시기의 생활과 작품 활동 등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게 했다. 청해진 수석공원에 있는 그의 시비는 1991년 10월 한국문학비건립동우회가 세웠으며 비문은 진동역 교수, 글씨는 이상보 회장이 썼다.

정약전은 8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을 보내다가 흑산도로 이배되는데, 동생인 정약용이 신지도의 형에게 보낸 시 2편이 전한다.

종두법을 실시한 지석영도 신지도에 유배된 인물이다. 그의 호 송촌(松村)도 유배지인 신지 송곡리에 있으면서 우두의 임상을 완료하고 <신학신설(新學新說)>이라는 의학서를 완성하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호를 송촌(松村) 이라 했다. 송곡 촌에서 일생에 가장 보람된 일을 했다 하여 만들어진 호이다.

또 한가지 특기할만한 내용은 장씨 집안의 여자가 유배되는 기록이다. 다산 정약용의 기록인데, 인동부에 살던 장현경과 그의 부친, 인동부사 사이에서 국상(國喪) 후 잔치를 여는 것이 문제가 되어 장현경이 망명하자 그 처와 딸 2명, 그리고 아들을 신지도에 유배하였다는 내용이다. 큰 딸이 수군진 군졸의 유혹에 못이겨 자결하자 이의 처리를 하는 과정도 기록되고 있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인 강진 다산에서 들은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신지도의 유배문화는 한양의 학문과 민속이 직접 전달된 곳으로 유배인으로부터 개화와 개혁이 가장 먼저 전파됐다. 이처럼 훌륭한 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 신지면은 그것을 알리는 테마가 너무 부족하다. 신지도에 유배온 인물들에 대한 정보로 ‘조선천재들의 문학공원’이라도 조성한다면 최소한 관광객에게 신지도를 알리는 역할은 하지 않을까?
 

정영래 / 완도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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