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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모스’, 그리고 인간의 품격

[완도 시론]정택진 / 소설가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8.06.30 17:35
  • 수정 2018.06.30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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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택진 / 소설가

‘이스모스’로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본이름이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그냥 그렇게 불렸다. 못먹고 자란 탓에 어른인데도 초등학교 4학년 정도의 몸피밖에 안됐다. 가퍼래처럼 헝클어진 머리에는 손수건이 댕케져 있었는데, 머리띠를 적신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가끔씩 아이들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는데, 불거진 광대뼈 아래 드러나는 듬성듬성한 누
런 이빨이 검게 탄 얼굴 때문에 외려 하얗게 보였다. 윗도리는 항상 런닝이었는데, 얼마나 오래 입었는지 누렇게 색이 바랜 것이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헌 넥타이로 꿰어진 후줄근한 양복바지는 종아리쯤까지 걷어올려졌고, 달랑대는 바지 밑에는 서너 군데를 헝겊으로 징근 꺼묵두리가 샌내끼로 질끈 동여져 있었다.

그런 차림으로 그는 홀어머니랑 사는 섬의 동쪽 끝 오막살이에서 뱃머리가 있는 섬의 서쪽 끝까지 십리가 넘는 길을 날마다 뛰어다녔다. 섬의 동네는 신작로를 따라 열려 있는 것이어서, 뱃머리에 가기 위해서는 일곱 개나 되는 동네를 지나야 했다.

그는 배 시간에 맞춰 신작로를 뛰었는데, 그가 지나갈 때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여지없이 아이들이 달려나와 “이스모스!”를 연호하며 뒤를 쫓았다. 어떤 아이는 돌멩이를 던지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작대기를 휘젓기도 하고, 덕구진 아이는 마른 쇠똥이나 개똥을 던지기도 했다.

라디오가 가장 현대적인 문명기기였던 시절,‘이스모스’는 아이들의 가장 만만한 놀이감이었다. 보잘것없어 마음대로 놀려도 되는, 어른이기는 하지만 아이들보다 더 시픈,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맥대로 갖고놀아도 되는, 아이들에게‘이스모스’는 인간으로서의‘품’도‘격’도 없는 그런 존재였다. 아마 대부분의 어른들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지방선거가 끝났다. 어떤 이는 당선의 기쁨에 들떠 술 한잔씩을 돌리겠고, 어떤 이는 낙선의 비애에 홀로 술잔을 기울이겠다. 응원한 사람이 뽑혀서 함께 기쁨을 누리는 자들도 있겠고, 고개 숙인 자에게 위로의 술잔을 건네는 자들도 있겠다. 승패가 있는 데라면 어디에나 있는 풍경일 것이다.

모두에게 투표권이 주어지고, 그 한 표가 동일한 권리를 갖는 것은, 상전과 하인의 시대로부터, 주인과 노예의 시대로부터 얼마나한 진보인가.‘보통선거’와 ‘평등선거’의 입장에서, 그리고 그것이 제도화된 사회에서, 그때의‘이스모스’와 이제는 어른이 된 아이들과, 투표를 한 사람들과 표를 받는 사람들과, 그리고 당선이 되어 기쁜 이들과 낙선해서 고개를 떨군 이들의 표는 다들 같다.

다들 같다고 본다. 그것은 투표에 부여한 사회적 의미이다. 하지만 투표 너머에 있는 인간으로서의‘품’과‘격’에서도 다들 한 표로 같을까.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어 허겁지겁 달아나던, 하지만 세상 누구보다 착하고 정직해서 누구에게도 못할 짓 안했던 ‘이스모스’와, 힘에게는 굽히면서 약한자에게는 군림하려 드는 이와, 겉으로는 고상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온갖 권모술수를 꾸미는 이와, 자기것도 아닌데도 제것인 양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이와, 되도않는 알량한 지식으로 힘없는 자를 괴롭히는 이에게 우리는 똑같이 인간으로서의 한 표를 줄 수 있을까.

인간에게 함부로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아니지 싶다. 아니 아니다. 세상에는 한 표를 빼앗아 차라리 개에게 주어도 시원찮은 인간이 있는 법이다. 누군가의 눈에 내가 그런 인간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인간이 분명히 이 사회에는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분명히 그런 인간이 있다.

투표장에 들어서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제는 세상에 없는‘이스모스’를 생각했다. 또 내가 인간으로서의 한 표를 가질 수 있나도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에게 용서해달라고 했다. 그때는 철이 없어 그랬다고, 아무것도 몰라서 그랬다고. 그리고 그분에게 말했다. 인간의 품격은 보이는 것에 있지 않다고. 인간의 품격은 당신의 그 후줄근함에 있지 않고 당신이 살았던 그 모습에 있다고. 당신은 참으로 인간으로서의‘품’과‘격’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그래서 감사하다고. 나도 인간으로서의 한 표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그가 살았던 오막살이 앞에는 오늘도 하얀 파도가 부서지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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