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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명상(冥想)! (2)

[무릉다원, 은선동의 茶 文化 산책 - 37] 김덕찬 원불교 청해진다원 교무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8.10.19 11:14
  • 수정 2018.10.28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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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찬 / 원불교 청해진다원 교무

명상에 대한 정의와 방법을 정확하게 알았다고 하여, 즉 깨달았다 하여 그 세계가 내 것이 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깨달아 안 것은 ‘아, 그렇구나!’ 하는 정도 일 뿐이다.

그 깨달아 아는 바를 충분히 익혀 온전하게 나의 것으로 만들어 나의 생활과 나의 삶을 통해 구현되었을 때 비로소 나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즉 어떤 분야든 관련된 많은 책을 읽고 연마하여 설사 세계적인 권위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의 삶이 그 깨달아 아는바에 바탕하여 스스로 본연적인 삶의 모습으로 실천하거나 살아내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묵묵히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것이며 가장 위대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실천을 통해 전개되는 세계는 그 존재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며, 아울러 각각의 역할과 소명도 각각의 자리에 함께 주어지는 것임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차와 명상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 관계를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좋은 글로 다선일여가 있다. 다도일미, 명선 등이 비슷하게 활용되는 구절들이다. 보다 적극적인 화두로 ‘끽다거’가 있었음도 살펴보았다. 다선일여와 선다일여. 차와 선은 하나이다. 다도일미, 차와 도의 궁극적 경지는 하나이다. 추사선생과 초의선사에 얽힌 ‘명선’의 이야기는 뒤로하고 앞서 표현된 구절들은 무슨 뜻일까? 차는 차이고 선은 선이며 도는 도일 텐데. 

차는 단지 찻잔 속의 차를 후루룩 하고 마시면 끝나는 것이 아님에 주목하자. 즉 차에는 묘법이 깃들어 있다. 종종 차를 마시다보면 묘함을 느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차는 차나무의 잎으로 만든 기호음료이다.

그런데도 같은 찻잎으로 만든 차가 마실 때마다 그 맛과 향이 다르다. 또 약간의 법제 차이에 따라서도 큰 차이가 있으며, 또한 같은 차인데도 마시는 방법에 따라서 그 맛과 향이 현저하게 다름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친환경유기농 찻잎이라는 전제로, 정밀하고 절묘한 제다법과 중정법에 맞는 차 우리는 방법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행다의 묘법은 맛과 향이 절묘하게 잘 발현되도록 하는 방법인 것이다.

차의 완성이기도 하지만, 종종 이 방법에 매몰되어 형식에 치우치거나 떨어져 차가 갖는 본연의 맛과 향속에 숨어있는 묘법을 놓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곤 한다. 즉, 차 우리는 방법을 터득하여 차의 맛과 향의 절묘함을 드러낸다면 차가 갖는 신묘한 특성을 잘 살려낼 수 있다.  나아가 찻자리에 함께하는 모든 이들이 차가 갖는 특성을 공유하여 서로 심신간 상승작용을 얻었다면 참으로 그 찻자리의 아취를 절묘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경지를 초의는 신(神)과 승(勝)이라 하였다.

이렇듯 제다와 행다 과정을 통해 우리의 정신적 영역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찻일에 있어 오롯함의 극을 이룰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을 차와 선이 둘이 아니며 그 묘미가 같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지의 느낌을 얻기가 사실 쉽지는 않지만, 자주 많이 마시다보면 아~하! 할 수 있지 않을까? 차와 하나되는 여여함이여! 음다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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