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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한 선비가 日 풍신수길을 암살했다

[특집] 원교 이광사의 아들 이긍익이 신지에서 쓴 조선 최고의 야사 '연려실기술'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19.01.19 18:55
  • 수정 2019.01.19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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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에 살던 소경의 딸이었다. 쾌활한 성격에 시문을 잘 짓고 거문고를 잘 탔으며 노래 또한 잘 불렀다. 산과 물을 찾아 풍류를 즐기며 금강산과 태백산, 지리산을 두루 다니다가 나주에 이르렀다.

때마침 고을 사또의 잔치라!
꽃같은 자태의 기생들이 가득히 앉아 있었는데, 헤어진 옷에 세수도 안한 채 태연히 이를 잡다가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니 숨은 진주가 빛을 발하듯 군계일학이라! 이어 자리가 파할 쯤, 꾀꼬리처럼 낭낭한 목소리로 "아~ 임과 함께한 동짓달 밤 시간이 너무나 빠르구나! 이 감미로운 시간 한 토막을 크게 베어내~"
"이불 속에 넣어두었다가, 나의 고운 임이 오시는 날에 다시 펼쳐내리"
절세가인 황진이었다.

황진이는 평소 화담 서경덕을 사모하여 거문고와 술을 들고 화담의 집을 찾아가 놀곤 하였다. 황진이가 말하길 “도력 놓다고 조선팔도 제일가는 30년 면벽수련의 지족선사를 하룻밤에 파계시켰는데,화담 선생만큼은 여러 해 동안 친하게 지냈지만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으셨다. 이 분은 진실로 성인이시다.”
그러며 "송도엔 삼절이 있습니다." 하고 말하니, 화담 왈 "삼절이 무엇이냐?"니, 이어 황진이는 "박연폭포와 화담 선생, 그리고 저입니다." 하고 답했다.

바로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내용이다.  조선 최고의 야사(野史) 연려실기술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수많은 내용들이 수록돼 있는데, 전설의 고향에서도 등장한 거위와 선비 이야기도 전한다.

윤회라는 한 선비가 젊었을 때 시골에 갈 일이 있었다. 날이 저물어 여관에 들어갔으나 주인이 방이 없다며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마당에 나와 있는데 주인집 아이가 커대란 진주를 가지고 나오다가 그만 마당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때 곁에 있던 거위가 달려들어 그것을 꿀꺽 삼켜 버렸다. 잠시 후 주인이 진주를 찾다가 찾지 못하자 윤회가 훔쳤다고 의심하고 그를 결박하고는 내일 아침에 관가에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윤회는 일체 변명을 하지 않고 다만 "저 거위도 함께 내 곁에 매어 놓으시오"라 말 할 뿐이었다.

그렇게 하룻밤이 지나고 아침이 돼 주인은 "이제, 관가에 가자"고 하니, 윤회의 말 "저 거위의 똥을 한 번 살펴 보시요!"하니,  그곳에서 영락없이 진주가 나오는 게 아닌가!
이를 본 주인은 부끄러워 깊이 사과하면서 "어제는 왜 말하지 않았소?"
그러자 윤회는 "어제 그것을 말했더라면 주인께서는 반드시 거위의 배를 갈라서 진주를 찾으셨을겁니다. 그러면 거위도 죽게 되는데, 제가 하룻밤만 치욕을 참으면 거위를 살릴 수 있잖소" 하더란다.

다음은 선조 이후 왕위에 올랐던 광해군의 재치 넘치는 이야기 한토막.
어느 날, 선조와 의인왕후가 10명이 넘는 왕자들을 모아놓고 "세상에서 가장 맛난 반찬 음식이 무엇이냐?"며 묻기를, 다른 왕자들은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댔으나 유독 광해군만은 조미료인 소금이라 답했다.
선조가 그 이유를 물으니 광해군은 "소금이 아무리 흔한 물건이라지만, 아무리 맛난 산해진미도 소금 없이는 100가지 맛을 이루지 못합니다."라고 답했다고. 이어 선조가 왕자들에게 가장 아쉽게 여기는 점이 무엇이냐 묻자, 다른 왕자들의 답변과 달리 광해군은 모후와 일찍 사별한 것을 가장 아쉽게 여긴다고 답해 이 일화를 전해들은 신료들은 일찌감치 광해군을 왕의 재목으로 주목했다고.

<연려실기술>에는 양조한의 손자 양부한에 대한 놀라운 기록도 실려 있는데, 양조한이 중국 사신 심유경을 도와 풍신수길을 독살했다는 것.

이 처럼 놀랄만한 이야기와 재밌는 이야기가 전하는 연려실기술.
책을 쓴 이긍익은 누굴까?
연려실기술의 첫머리를 보면, 그의 아버지가 책이름을 휘호하였는데, 바로 원교 이광사다. 이광사가 신지에서 유배 당시, 아들 이긍익은 아버지를 모시며 조선 최고의 야사를 기록하게 되는데, 야사라곤 하지만 지극히 객관적으로 서술해 냈다.

그가 말하길 “이 책은 사람들의 귀나 눈에 익은 이야기들을 모아 분류하여 편집한 것이요, 하나도 나의  사견으로 논평한 것이 없다. 나는 사실에 의거하여 수록하기만 할 뿐 그 옳고 그름은 후세사람들의 판단에 미룬다.”고 했다.

노·소론의 당쟁 속에서 뼈아픈 가정사를 겪은 이긍익은 자신의 불운한 환경을 원망하기보다는 부친의 유배지인 신지도에서 여동생을 데리고 채소밭을 가꿔 생계를 이으면서 역사서인 『연려실기술』을 편찬했다.

역사학자들은 국내 사료에 국한하여 남인·북인·노론·소론 등 당파를 가리지 않고 사실 그대로의 자료들을 모두 인용하여 제시하며 객관성을 높인 문헌으로는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이 유일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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