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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추억

[완도 시론] 정병호 /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원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01.19 19:15
  • 수정 2019.01.19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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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호 /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원장

어린 시절 고향에서의 추억은 참 많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추억은 청년시절 군부독재로 암울했던 시절 데모했던 거 말고는 특별하게 생각나는 게 없다. 이유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

초등학교 때 수영을 배운 후로는 초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주로 선창가에서 멱을 감았다. 무더운 여름 소년을 유혹하는 바다의 손짓을 실내 수영장을 애용하는 요즘 얘들은 잘 모를 것이다. 학교수업을 빼먹을 만큼 유혹이 강렬했다.

육지의 논둑시간은 이에 비할 바 아니다. 여름방학이 되면 동네 선후배들이 모여 읍내 신흥사 절 아래 오솔길을 따라 본낭기미(망남리) 모래사장에까지 가곤 했다. 갈 때는 좋은데, 올 때는 좀 괴롭다. 무엇보다도 목마르고 배고프다.

돌아오는 길에 남의 밭에서 무를 몰래 뽑아 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가끔 들킬 때도 있었으나, 대개는 주인한테서 너그럽게 용서받곤 했다. 거의 매번 굴쩍에 베였으나, 대개 그냥 두면 나았다. 바닷물은 천혜의 소독약이기도 했다.

피서보다는 물놀이 자체가 즐거웠는지도 모른다. 가을학기가 시작되어 조석으로 제법 쌀쌀할 때도 저녁에 선창가로 삼삼오오 모여들어 멱을 감았다. 막상 바닷물에 몸을 담그면 바깥보다 더 따뜻했다. 어린 소년들에게 바닷물은 참 신기했다.

가을은 주도 땟밤이 영그는 계절이다. 땟밤은 호기심 많은 소년들을 유혹했다. 라면 땅 봉지를 허리춤에 차고 뱀이 많은 주도에 상륙하여 미끌미끌한 아열대 상록수에 기어올랐다. 돌아오는 길에 땟밤을 몽땅 바닷물에 쏟아버린 허망함을 어찌 글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거기다 마주 오는 너울을 피하지 못해 짠물 한 모금 마셨을 때의 아찔함과 피로감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봄, 가을로는 낚시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당시는 장비도 형편없었는데 너도 나도 낚시하러 다녔다. 그때는 고기가 많았는지 대나무 첨대나 줄낚시로도 잘 낚였다.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느낄 수 있는 감생이 손맛은 아들에게도 그대로 승계됐다. 물론 아무리 미끼가 좋아도 고기가 잘 안물 때도 있었으니, 어린 나이에 벌써 세상만사 굴곡이 있다는 이치까지 터득했다.

본낭기미 사는 친구 덕에 주낙의 즐거움도 맛볼 수 있었다. 주낙을 던져놓고 한 참 뒤 거둘 때까지 잊어버리고 있어도 된다. 계속 신경을 써야 하는 첨대나 줄낚시에 비해 상당히 효율적인 낚시법이다. 손맛을 느낄 수는 없다는 것이 흠이나, 한꺼번에 올라오는 볼낙, 놀래미, 쏨팽이 등은 농부가 가을추수에서 느끼는 풍족함에 견줄 만하다.

철마다 해산물로 만든 향토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고구마순 같은 야채와 함께 지진 멸·갈치·병어, 고추장에 찍어 먹는 쭈꾸미·갑오징어, 구워서 간장 찍어 먹는 말린 장어, 깔끔한 쏨팽이 매운탕, 간장 김에 파장 넣어 싸먹는 삼치 등은 투박하면서도 맛깔스럽다. 음식 맛은 무엇보다도 재료에 좌우됨을 도회지 살면서 터득했다. 수입 냉동생선은 최고의 요리사가 갖은 양념으로 요리해도 고향 생선요리만 못하다. 그래서 요즘 제철인 장어탕은 혼자 먹기 아까워 완도 여행가는 지인들에게도 꼭 권한다.

겨울에는 김 말고도 매생이, 감태가 나온다. 도회지 사람들은 매생이 맛을 알지만, 아직 감태 향이 주는 오묘한 맛은 잘 모른다. 그래선지 보통 매생이 시세가 감태보단 낫다. 그런데 올해 매생이가 풍년인지 가격이 형편없다. 싸게 먹을 수 있어 좋은 점이 있지만, 시름에 빠진 생산어민들 생각에 마음이 편치 못하다. 조금 있으면 감태가 나온다. 사촌누나가 연례행사처럼 보내주는 감태지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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