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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과 완도 3·15 만세

[독자 기고] 이승창 / 자유기고가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01.20 06:47
  • 수정 2019.01.20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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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창 / 자유기고가

올해는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나라를 독립하기 위해 벌인 3·1운동 100년이 되는 뜻 깊은 해다. 3·1운동은 민족 자결과 국가 주권을 당당히 요구했던 ‘근대적·국민적 민족해방운동’으로 대내외적으로 평가받고 있고, 정부는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우리는 자랑스런 우리들의 역사를 쉽게 잊고 있어 안타깝다. 3·1운동은 알고 있지만 우리 지역 완도에서 벌어졌던 완도읍과 소안의 3·15 만세운동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군민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특히 소안도는 함경도 북청, 부산 동래와 함께 항일운동이 가장 강렬하게 벌어졌던 지역으로 손꼽히고 있다. 소안도 주민 중 광복 후 건국훈장을 받은 사람은 20명, 기록에 남은 독립운동가만 89명이나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안도 항일독립운동은 우리 지역에서는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920년대 6,000여 명의 주민 중에서 800명이 넘는 주민이 일제에 의해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혔던 ‘해방의 섬 소안도’의 항일 해방 운동의 뿌리는 갑오년의 동학 농민 운동으로까지 올라간다. 갑오년에 동학접주 나성대와 혁명군들이 소안도로 들어와 군사 훈련을 받을 때 소안도 주민들은 성심껏 군사들의 식량을 조달했고, 혁명 실패 후 주도적인 몇몇 주민들은 관군에게 청산도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이후 소안도가 독립 투쟁의 근거지가 된 것은 소안 출신 동학군 이준화 선생과 의병 몇 사람이 1909년에 자지도(지금의 당사도) 등대를 습격하여 일본인 등대 간수 4명을 사살하고 주요 시설물을 파괴하는 의거를 감행한 당사도등대 습격사건이 시초다.

소안도에서 강력한 항일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중화학원이 있었다. 1913년 송내호•김경천 등에 의해 설립된 사립 중화학원은 토지 소유권 반환 소송에서 승소한 후에 면민들의 성금을 기반으로 사립 소안학교로 발전하여 수많은 항일독립운동 지사들을 길러 냈다. 당시 소안학교에는 노화도•보길도•청산도는 물론 해남이나 제주도에서까지 유학생들이 몰려올 정도였다고 한다.

오랫동안 역사 속에 묻혀있었던 소안도 항일운동은 1990년 비자리에 항일운동기념탑이 세워짐으로써 비로서 복권되었고, 2003년에 국가보훈처와 완도군의 지원을 받아 옛 소안사립학교 터에 소안항일운동기념관과 기념탑을 건립했고, 2005년에는 소안학교 건물을 복원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안항일운동은 안타깝게도 3·1운동 기념일과 8·15 광복절 등에만 지역의 뜻있는 일부 인사들에 의해서 잠시 기억될 뿐이다. 완도군에서는 100년 전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궐기했던  3·15만세운동을 기념하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지 알려진 내용이 없어 알 수가 없다.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군민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기념행사를 계획하고 실속있게 치뤄내서 선조들의 숭고한 업적을 널리 알리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는데 남들이 우리를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도 이기적인 생각이다. 우리들의 자랑스런 역사는 기억 속에 오랫동안 간직해야 하고, 선조들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고 승화시키는데 모두의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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