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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운동 앞장 선 완도 지사들 '재조명' 필요

사회주의 활동가로 비춰져 서훈 받지 못하거나 비운의 죽음 맞기도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9.02.28 17:53
  • 수정 2019.02.2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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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호남선 통학열차 안에서 일어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교 학생들의 충돌.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 3학년 학생 후쿠다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인 박기옥과 이광춘 등을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였고 이를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가 달려와 항의했는데, 후쿠다가 "뭐냐 조센징주제에"라는 소리로 결국 박준채가 주먹을 날리면서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은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중학 학생들의 패싸움으로 확산되었다. 그런데 일본 경찰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을 편들고 조선인 학생들을 구타하였다.

당시 열차에 승선했던 광주일보의 일본인 기자가 신분을 밝히면서 조선학생들의 일방적 잘못이라며 비난하고, 열차에 있던 다른 이들도 조선 학생들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결국 박준채와 친구들은 속으로 삭이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11월 3일. 개천절, 성진회 창설 3주년, 그리고 메이지 유신을 기념하는 명치절이 겹치는 일요일. 일제는 학생들에게 등교하고 일요일에 학교에 나오라니! 신사를 참배할 것을 요구했다.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명치절 기념식에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고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10월 30일 사건을 편향되게 보도한 광주일보사를 공격했다.

결국 항일운동의 물결은 광주 전역으로 퍼져 곳곳에서 가두시위가 일어나게 된다. 11월 12일, 독서회의 주도로 네 학교의 학생들과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대규모로 시위를 벌였다. 항일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이듬해인 1930년 3월까지 전국 320여개교에서 5만여명의 학생의 참여해 1462명이 퇴학, 3000여명이 퇴학 혹은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과 관련해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이 내린 판결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재판의 피고 85명 중 완도 출신은 8명으로 광주 출신 12명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 참가했다. 참가 숫자의 적고 많음이 문제가 아니지만 활동 역시 뛰어났다.

이 사건 관련자 85명 중 완도 출신들의 인적사항과 위반법령 및 형량은 다음과 같다.

● 장석천(29세): 신지면 송곡리, 농업, 치안유지법•보안법•출판법 위반, 징역 1년 6월
●문승수(25세): 군외면 대야리 사립학교 교원, 치안유지법 위반, 징역1년
●정남균(27세): 고금면(현.약산면)장용리, 면화상, 치안유지법 위반, 징역1년
●유치오(24세): 고금면(현.약산면)관산리, 오사카영어학교 선생, 치안유지법 위반, 징역1년
●정석규(20세): 소안면 비자리, 광주고보 학생, 치안유지법•보안법 위반, 징역1년
●김홍남(21세): 청산면 당낙리, 광주고보 학생, 치안유지법•보안법 위반 징역1년
●박노홍(24세): 고금면 청용리, 광주사범학교 학생, 치안유지법•보안법 위반, 징역1년
●황상남(21세): 군외면 신학리, 광주사범학교 학생, 치안유지법•보안법 위반, 징역1년
●김향남(24세): 청산면 여서리, 학생, 독서회 활동, 징역8월
●황남옥: 완도 장좌리, 형량 미상에 집행유예

이 밖에 이기홍, 박노기, 최창규, 문승수 등은 광주학생사건 당시 “조선민중은 궐기하자. 청년대중이여, 죽음을 초월하여 투쟁하자. 검거자를 탈환하자. 언론집회, 결사의 자유를 획득하자”라고 외쳤으며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특히 장석천은 그 활동이 대단했다. 동경상대를 중퇴하고 조선일보 광주지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신간회 광주지회 간사 겸 전남청년연맹 위원장으로서 광주학생사건을 지도하였다.

1927년 9월 23일에도 전남청년연맹 집행위원 강석봉•김재명•강해석 등과 피검된 바 있으며, 1930년 9월초에는 신간회와 제휴, 서울에 들어가 휘문고보•보성고보•경신고보•배제고보•제2고보 등의 학생대표들과 회합하고 제2차 학생시위를 계획하였다. 이 일로 서울에서만 1,000여 명이 투옥되고 500여 명이 처분받은 바 있다. 조선일보는 이 사실을 1930년 9월 13일 호외로 크게 보도하고 있다. 이 엄청난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된 장석천은 1932년 1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2년 징역형을 받았다.

거론된 완도출신 활동가들의 판결문뿐만 아니라 같이 기소가 제기된 48명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단어가 공산주의라는 단어이다. 여기에서 재미있게도 공산주의를 대신해서 “항일(抗日)”혹은 “반일(反日)”, “독립운동(獨立運動)”, “민족해방(民族解放)”으로 바꾸어보면 그렇게나 잘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항일의식이나 민족운동, 농민조합운동 전부를 공산주의로 매도해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인데,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이 바로 공산주의라는 이분법적 이론도식으로 항일이나 독립을 전부 공산주의라고 매도해 버렸다는 사실을 판결문을 꼼꼼히 본 사람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직감할 수 있다.

광주사범학교 출신인 황상남 활동가의 안타까운 소식도 전하고 있는데, 그는 사회주의자로 분류 돼 해방 후 경찰의 손에 죽게되면서 최근 사회주의 활동을 했다는 독립운동가들을 재평가하고, 독립유공자로 추진한다는 소식에도 추서되기가 어렵다는 후문이다.

오로지 자기들만이 잘살고 자본만을 위한 제국주의에 반대한 가장 큰 세력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이었다. 이제, 이념을 넘어 새로운 세기를 맞은 천년, 민족과 국가, 그리고 지역을 빛낸 인물들에 대해 재조명 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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