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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 장보고 시대의 차문화(1)

[무릉다원, 은선동의 茶 文化 산책- 51] 김덕찬 / 원불교 청해진다원 교무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03.04 08:39
  • 수정 2019.03.04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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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찬 / 원불교 청해진다원 교무

“청해진은 장보고다!” 청해진시대를 828년에 장보고가 열었고, 846년 장보고 사후에 닫혔기 때문이다. 참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그 청해진시대의 차문화는 어떠했을까?

약20년도 안된 짧았던 그 시대를 시간을 거슬러 1200년전으로 가 본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로 고려시대 왕명(인종23년, 1145년)으로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는 ‘흥덕왕 3년인 828년 4월 궁복을 청해진 대사로 삼았다.’ 그리고, ‘이해 12월 당나라에 조공사를 보냈는데 이 때 김대렴이 차 종자를 가져왔으므로 왕명에 의하여 지리산에 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차마시는 풍습은 이미 선덕왕(632~647) 때 부터였으며, 이 때에 이르러 성하였다’고 덧붙이고 있다.

삼국사기는 차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고려 충렬왕(7~9년경, 1281~3년) 때 보각국사 일연(1206~89)이 쓴 『삼국유사』는 경덕왕(742~765) 때 충담스님이 왕께 차를 접대하고 미륵세존에 차를 공양했음을 전하고 있다. 또한, 830년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경남 하동 화개의 쌍계사에서 850년에 입적한 진감선사(774~850)의 대공탑비에 차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체징보조(804~880)도 837년 중국에 갔다가 3년 만에 귀국해 보림사에 자리 잡았으므로 청해진 선단의 신세를 졌을 것이다. 중국에 음다풍이 정착한 것은 당나라 태종(627~647) 때 이므로 삼국사기의 기록인 선덕왕 때 음다풍이 있었다는 사실은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의 차는 차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육우(757~803)가 차의 근원과 먹는 법, 다구 등에 대해 쓴 『다경』이란 책을 남겨 중국의 차 생활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의 승려들이 바로 이 무렵 가장 많은 수가 중국에 건너갔으므로 청해진 시대를 맞아 중국의 음다 풍습이 유행한 것과 차 종자 수입은 자연스러웠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계속 차를 마신 흔적은 많은 유적과 글에 남아 있다. 혹 기존에 재래종 차나무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 시기에 김대렴이 차씨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은 기록은 새로운 종의 차 씨앗이 반입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차를 생산했던 최초의 기록은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전남 21개, 전북 9개, 경남 12개로 모두 42개소이다. 서남해안 인근 즉, 청해진 지역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전라도 지방은 청해진시대 스님이 드나든 절 주변에는 오늘날까지도 모두 차나무가 야생하고 있고, 나주 불회사 주변에는 다소茶所가 있어서 행정단위의 이름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몹시도 안타까운 것은, 846년 신라 문성왕의 지시로 염장에 의해 장보고가 암살당한 사건이다. 청해진이 설치된 지 18년 밖에 안 된 시간. 이후 신라 역시 급속도로 무너지게 되고, 후삼국시대가 열려, 918년 왕건이 고려를 세우기까지 대혼란의 격동기 였었다. 새로운 정신문화로써의 차문화가 정착하기에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을까?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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