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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 정리' '군 차원 기념사업회 재건' 공감

[언단의 장]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과 완도항일운동 과제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03.06 12:53
  • 수정 2019.03.06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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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본보에선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와 관련한 지역 인사들과 1문 1답으로 언단의 장을 꾸렸다. 참여인사는 서을윤 전 군의원(신지항일운동기념사업회 임원),  이대욱 회장(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 배철지 시인(전. 완도군항일운동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최병진 전 군의원(전. 완도군항일운동기념사업회 회장)로, 조장원 회장(고금항일충혼탑 추진위원장)은 연락이 닿지 않아 불참하게 됐다.

질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올해 3·1운동 100주년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으로 우리 민족에게는 아주 뜻깊은 해다. 우리 완도의 선조들도 일제강점기 3대 강성지라 불리울 정도로 항일운동사에서 빠질 수 없는 역할을 했다. 이번 100주년 맞아 완도항일운동이 갖는 현재적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2. 완도항일운동사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사건이나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3. 우리는 선조들의 항일운동 ‘신화’를 이야기하며 살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과 연결되지는 않는 것 같다. 완도항일운동,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념해야 하는가?

4. 현재 소안과 신지는 항일운동기념사업회가 구성돼 있고, 특히 소안은 지속적인 항일운동기념사업을 계승해 나가고 있다. 또한 고금은 항일운동충혼탑을 건립했고, 약산도 항일운동기념공원을 조성 중이다. 하지만 다른 읍·면에도 항일운동의 역사가 존재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하고 계승하는 것은 사라져 가고 간다.  완도항일운동을 기념하고 계승하는 것은 관 차원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민간영역에서도 지속적으로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역량과 통합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완도군항일운동기념사업회 재건의 필요성) 

5. 2000년 발간된 ‘완도군항일운동사’는 완도군 항일운동 역사를 정리하는데 매우 뜻깊은 여정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당시 편찬작업에 참여한 분들도 재판기록이 빠지고, 일부 오류 논란도 있다고 한다. 완도군항일운동사 개정·증보판 편찬작업을 시급히 추진해야 된다는 여론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6.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대욱 회장]

2. 소안의 경우 워낙 집단적으로 딱히 어느 사건이라고 말하기가 그렇다.
경술국치(1910년) 1년 앞서 자지도 등대의병 의거가 있었다. 경술국치 이전과 이후 성격 자체가 다르다. 얼마 전 1886년도 음력 7월 25일날 소안 주민 200명이 소안 맹선리 일본인 거주지 방화 의거 소안의 항일운동 역사가 지금보다 훨씬 이전의 것이란 자료가 일본 영사관에서 본국에 보낸 문서가 발견돼 관심이다.   

3. 항일운동의 성지란 입장 정리가 돼야 한다. 무조건 우리 지역에 분산돼 항일운동의 성지가 되는게 아니고 역사학자나 사회학자들이 소안도만 성지라 부르라 그말이다. 그것은 어떤 성격의 성지냐? 1920년대 800여명이 불령선인으로 불리면서 항일운동을 격렬하게 했다, 격렬하게 했던 것은 우리나라 전체 지역에서 한군데가 아니다. 항일운동을 전개를 할 때 누가 앞장서 나를 따르라 하는 형태인데 소안도는 한두 사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전체 면민이 항일운동을 했고, 일제강점기에 지금도 뭔일을 한다고 하면 자기 신분을 안밝히잖느냐? 그 당시 역사학적으로 따져보면 소안도 인구는 6천여명, 호는 1,030호다. 1,030호 중에 할아버지, 손자 다 하는게 아니고 대표성 갖고 한집의 한사람씩 탄원서를 받을 때 800명이 냈다. 1,000호에서 800호가 서명을 했다. 전체 일제의 녹을 먹고 있는 사람이나 친일하는 사람 빼고 다 항일운동을 했다. 앞으로 온 군민이 나라사랑하는 독립유공자 답사지로 소안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소안은 정신적인 내용이 모든 국민들이 느끼고 본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항일운동 성지란 명분있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800명 불령선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선양하고 계승발전시키기 위해서 집집마다 나라사랑하는 태극기를 365일 걸고 있다. 이것만 봐도 전체 국민이 민족과 국가, 나라를 배우고 찾아보기에는 소안만한 데가 없다. 

4. 완도 속에 소안이다. 완도를 벗어날 수는 없다. 소안의 정신을 홍보매체를 통해서 전파를 하고 싶어도 소안항일운동사 현장체험학습도 하고, 학생을 위한 우수한 강사를 초청해서 역사를 배우게 하는데, 지역으로보면 12개 읍·면 지역의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사람이 다 있다. 지역의 자존심 상으로 굳이 완도 내 다른 곳의 항일운동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 독립운동가들이 전부다 이념에 묶여, 공산주의에 연루돼 괄시를 받는다. 자랑스럽지 못하다 이말이다. 외부에 독립운동했던 선열들의 뜻은 숭고하고 발전시켜야 하지만은 해방 후 이념갈등으로 인해 그 모든 것이 많이 퇴색돼 있다. 그걸 극복해야만 완도는, 소안이 더 빛나고 완도인의 자존심이 더욱 빛나게 하려면 그걸 극복해야 한다. 극복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전의 항일운동을 했던 지도자들은 이념적인 문제에서 족쇄를 풀어줘야 한다.
그러면 세상에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데 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완도군항일운동기념사업회가 2000년에 완도군항일운동사를 발간했지만은 그 내용 수록을 재정비하고 다시 정리해서 발간할 필요가 있다. 완도군 전체 군민들이 자랑스럽고 떳떳한 항일운동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그 중심축에 언제나 소안도는 가게될 것이다. 

5. 새로운 논문 등을 포함해 소안항일운동사를 발간했다. 새로운 내용과 빠진 재판기록 등을 추가해 완도군항일운동사 개정·증보판을 발간해야 된다고 본다. 또한 완도군항일운동사를 전국 연구기관, 도서관, 문화원 등에 배포해 자랑스런 역사를 전국에 알려야 한다. 그리고 허사겸 선생 등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일제강점기를 넘어 항일운동한 것도 기록해 줘야 한다.
무조건 대항만 하자는 것이 아니라 못배워서 나라를 잃었기 때문에 배움의 역사는 항일의 역사다.
모두 배우고 살자. 그래야 이 다음에 후손들이나 누구나 지키는 힘이다. 사립소안학원을 주민들이 각출해서 배움의 터를 만들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대단한 정신적인 지주인 사립소안학원 복원사업을 각지에서 견학을 하고 배워간다. 소안은 그런 역사도 팔고 있다.


[서을윤 전 군의회 부의장]

1. 일제 강점기 민족 운동사에서 함경도 북청, 부산동래, 완도는 항일독립운동 3대성지로서 일제의 무서운 총칼 앞 에서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독립운동을 가장 활발하게 했던 곳이다.
완도의 특징을 보면 해조류, 김, 어장 등 경제력이 타지역보다 우위에 있어 교육 수준이 높았으며, 지역 주민의 단결력이 큰 몫을 했다고 본다.
금년 뜻 깊은 100주년을 맞아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이 잊혀지지 않도록 사회단체, 언론인, 군민 모두가 참여하는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독립운동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2. 신지 학술 강습소 사건과 신지 주재소 태극기 설치사건이다. 신지 학술강습소 사건은 1924년 3월 신지면 대곡리에 지역 주민들의 지원으로 1년동안 건물 공사 후 신지 사립학교 학술 강습소가 개설하였으나 당시 학생들에게 불온한 창가를 가르쳤다는 혐의등 으로 교사4명 구속되고 동년에 일제 강압으로 폐교 조치됐다.(당시 학생200여명)
신지 주재소 태극기 설치사건은 1925년 1월초 완도군 당국이 신지 학술 강습소를 문제 삼고 있던 시기 20세 전후 청년6명(학생 양양순외 5인)이 경찰의 취조결과 주재소 순사가 주민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대하는것에 불만을 품고 주재소 앞에 태극기를 세웠다고 한다. 장흥검사국에서 이들의 신병을 넘겨받아 취조하였으나 이들의 가족과 면장을 검사국에 호출 후 6명의 청년들에게 기소유예 결정을 내렸다.

3. 일제 식민지하에서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투쟁한 애국선열들의 고귀한 업적이 아직 체계적이지 못 한 것 같다. 계속해서 자료발굴을 수집하고 선인들의 큰 뜻을 군민 모두가 올바르게 이해하며 계승발전 시켜야 한다.

4. 완도는 지리적으로 섬으로 형성되 있으나 각 지역마다 항일운동이 활발히 전개 돼 온 것은 틀림없다 읍면에서도 항일운동 기념사업회가 필요하며, 완도군 항일 운동기념사업회도 조속한 시일내에 구성하여 숭고한 항일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

5. 2000년 완도군 항일운동사, 2014년 신지도 항일운동사, 2016년 소안항일운동사 책자가 발간되었으며 그 후 여타 읍면에서도 충혼탑 및 기념공원을 조성중에 있다.
완도군 항일운동사 개정 증보판 편찬 작업이 반드시 필요 하다고 본다.

6. 2018남북, 북미 정상 회담으로 한반도 정세가 변화하고 남,북 관계가 전환점을 맞고 있다. 완도는 항일운동의 성지답게 민,관이 협력하여 항일 정신 운동 등 시대정신에 맞는 다양한 활동을 펼쳐 나가야 한다.


[최병진 전 군의원]

4. 완도로 항일운동을 통일해야 명분이 있다. 군외, 고금, 약산 등 다른 지역이라고 항일운동이 없었겠느냐. 민간인 학살 사건이나 광주학생운동 주동자가 약산 사람이다.
문제는 완도군항일운동기념사업회를 살리려면 읍·면을 하나로 아울러야 한다. 하나로 아우르지 않고는 아무 의미가 없다. 전체로 ‘완도’ 항일운동하는 부분들에 동의들이 돼야 의미가 있다. 조직이 없는 곳은 놔두더라도 조직이 만들어진 소안과 신지는 완도군항일운동기념사업회 지회식으로 예속되게끔 정리를 해야 된다. 정신을 계승하는데 함께해야 된다는 말이다.

5. 순수한 목적이 아니라 예산 가져다 해보려는 마음으로 뛰어들어서는 안된다. 당시 편집위원장을 맡았던 정병호 선생이 그런 부분들은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어떻든 간에 당시 그런 예산이 주여진 동기도 왜곡된 부분이 있었을망정, 그런 계기를 만들어 했다는 것도 중요하고, 역사라는 것도 후대에 평가가 되는 부분이니까, 또 잘못된 부분도 역사는 역사다. 교수들 위주로 항일운동사가 써져 있다. 그때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알려지지 않은 항일운동 이야기들도 있다. 써진 내용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더 찾아 넣어야 되는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한곳만 특화시켜서는 안된다.

 
[배철지 시인]

1. 이 나라는 임시정부 수립을 근간으로 삼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임시정부는 항일운동의 기치 위에 세워진 것이며 그 항일 운동의 불씨를 지핀 곳은 나라 안에서도 여러 곳이지만 그 중  완도가 가장 큰 불길을 피워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저 역사책에 몇 줄로만 기술될 뿐이지 그 흔적은 몇 개의 비석으로만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정신이 올곧게 계승 되어 가는지도 의문스럽다.  

2. 하나하나 짚어보면 많지만 완도 곳곳에 사립학교를 세워 후진들을 양성한 일이다.

3. 기념보다는 그 정신을 계승하는 게 옳다고 본다. 기념은 일회성이지만 정신을 계승하면 길이 이어지기에 그렇다. 완도항일운동의 정신은 우선 하나 됨이었다. 소안면 토지 계쟁사건의 소송이 승소한 것을 기념하여 소안 장날,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주머닛돈을 갹출해서 사립학교를 세운 재원을 마련한 일은 모두가 하나됨의 한 전형이다. 다음으로는 불굴의 저항성이며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연대이다. 이런 정신들을 계승하여야 한다.    

4. 완도군항일운동기념사업회는 다시 재건되어야만 한다. 지금의 상황을 보면 여러 읍면에서 제각각 기념사업을 추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완도의 항일 운동은 각 읍면별로 한 것이 아니고 서로 연대하였다. 그래야만 증폭된 힘을 낼 수  있었기에 그리하였다. 그것이 연대의 힘이다. 같은 이유로 완도군 전역을 아우르는 기념사업회를 다시 세워야만 한다.

5. 당시에는 그 정도의 책을 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기념사업회 초대 회장인 고 김진택씨가 노구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부산으로, 대구로, 서울로 다니면서 자료를 수집하지 않았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발간 이후로 오류와 누락된  부분이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류는 수정하고, 누락된 부분은 보완하고, 새로운 연구논문을 수록해서 완결된 완도군항일운동사를 편찬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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