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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 귀성(歸省)과 귀경(歸京)길

[에세이-그리움을 그리며] 최정주 / 재경 향우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03.12 09:43
  • 수정 2019.03.12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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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주 / 재경 향우

한양에 뿌리를 내린 지도 어언 34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에도 고향을 향한 마음은  애틋함과 가벼운 설레임이  항상 공존하는 모양이다. 풋풋한 젊은 사내 녀석의 상경에는 원대한 꿈과 포부, 목표라기보다는 고단하고 피폐한 시골의 탈출에 대한 갈망이 친척과 가족  그리고, 나의 탯줄을 묻었던 야트막한 언덕을 뒤로하고 미지의 세계로 뛰어든 것이었다.

그렇게 출발한 시골 촌뜨기가 이제 중년을 넘어 노년기를 앞에 두고 또 한번의 설 명절을 쇠러 고향 길로 향한다. 이런 저런 준비한 꾸러미가  가벼운 이삿짐과 다름없다. 며칠 지낼 옷 보따리가 선물보다 무겁고 부피도 크니  자칫하다 보면 손에 주어진 선물이 작아 실망할까 우려하는 자식의 야박한 귀성길. 

그러나 고향을 향한 마음만큼은 큰 설렘으로 포장돼 끝에서 끝인 장거리 운전의 고행도 평소와는 달리 그리 지루하지 않게 도착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우뚝 솟아있는 상황봉과 주변의 준봉들은 그대로지만 주변 자락의 민가들과 삶의 방식들이 남긴 환경들은  많은 세월의 변화가 주는  또 다른  아쉬움이기도 하다.

수도 없이 재잘대던 고만고만한 아이들의 웃음소리, 설 명절을 앞두고 초가집 지붕 위에 수북이 쌓인 하얀 눈도 없는  휑한 찬 기운만이 겨울임을 알려줄 뿐,  집집마다 널려진 생선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냉장고 깊숙이 몸뚱이를 숨기고 있음이 아닐까. 설은 목전이나 설이 보이지 않는 그런 세상, 그래도 오늘의 내일, 내일의 오늘은  항상 그렇게 슬쩍  와 있었다.

섣달 그믐날, 이집 저집 앞 마당  마을 초입에 그리고, 도로 한 켠에 주차돼 있는 차량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그런 그런 사연들을 안고 고향으로 달려온 민초들의 발 걸음이 한데 모아지는 그것이 명절이 주는 축복이고 지혜인가 싶다.  너무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잠시 뒤도 돌아보고 부모 형제의 정도 나누라는 선조님들의 삶의 지혜가 아닐까.  

마을 회관 앞,  양지 바른 마당에 큼지막한 멍석이 깔리고  그 동안 밀린 정겨움과 윷놀이가  행해지고 있었다. 빈집과 집터만 남은 흔적들이 흉물스럽기도한  촌 자락에도 사람들의 온기가 퍼지고 그들이 남기고 갈  담배 연기와 걸쭉한 객기가  그래도 보기 싫지가 않는다.

정월 초하루 아침, 이 산 저산  조상의 선산에 성묘 가는 무리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게 많아지고 해가 환하게 떠있는 때 늦은 감이 있는 아침이  언뜻, 수 십년전 어린 시절의 설날 아침과 비교돼 정감은 덜 하지만  그래도, 허허로운 산골짜기와 들녘을 메꿔 주는 후손들의 행열이 있어 선조님들의 아침도  외로움이 덜할 것 같아  덩달아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동생들과의 성묘 길에도 옛날을 회상하고  슬그머니 미소를 지어봤던 여유로움이 그것이다.

귀경길, 바리바리 싸놓은 어머니의 보따리들이 수북하고 가짓수가 많아지고 있다. 트렁크에도 넘쳐 뒷자석까지 어머니의 마음이 꽉 찰때  자식들은 배부름을 안고 고향을 떠나간다. 읍내 운동장 한쪽에  연이 날리고 있었다. 대나무와 신문지로 만든 옛 연이 아니고 현대적으로 변신한 연이 높이는 날지 못하고 이리저리  몸을 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연지기는 아이가 아닌 사십대로 보이는 어른이다.  아마도 옛 생각이 나서 저러나 싶은데  왠지 쓸쓸하고 외로워 보인다. 혼자서 연을 날리고 있어서이다.  그 옆 인도에는 검은 페딩 롱점퍼를 입은 젊은 여학생 둘이서 담소를 나누고 걷고 있지만 연은 쳐다 보지도 않고 열심히 얘기만 하고 간다. 완도다리를 건너야 할 즈음  괜스레 주위를  휘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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