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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항일운동사 발간, 일종의 명예회복 같은 의미”

[이 사람] 2000년 완도군항일운동사 편찬 일익 담당한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9.03.15 06:00
  • 수정 2019.03.15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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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통화는 쉽지 않았다. 3·1운동 100주년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올해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그도 물을 만났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에서 2000년 발행된 완도군항일운동사 개정·증보판 편찬 여론이 일자 당시 그 일익(一翼)을 담당한 그를, 설 명절 전 인터뷰 하기 위해 연락했지만 그의 바쁜 일정 때문에 직접 인터뷰는 어렵게 됐고, 명절 이후 통화하자는 것이 지난 후 2주가 훌쩍 지나서야 연결이 됐다. 현직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수업을 해야 되는 부분도 있었을 터이지만 그의 페이스북을 보니 그도 그럴만했다.

지난해 11월 그는 조선총독부가 자신들의 정책을 합리화하고 미화하기 위해 애썼던 <시정 25년사> <시정 30년사>를 번역해 왜곡과 미화가 심한 부분을 찾아내 역주로써 그 문제점을 지적해 <국역 조선총독부 30년사>로 묶어 펴냈다.

또한 연구년을 맞아 여러 해 동안 쓴 사론들을 모아 ‘21세기 한국사학의 진로’라는 책도 출간했으며, 지난해 12월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와 함께 한국사연구회 회장으로서 ‘3·1운동 100주년 기념학술회의<3·1운동은 어떻게 전국으로 확산되었나>’를 주관하고 ‘만세시위의 기폭제가 된 서울시위’라는 논문도 발표했다. 

최근엔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KBS 역사저널 그날’에 출연하는 등 여러 방송과 신문사에서 많은 기자나 작가, PD분이 자문과 인터뷰를 요청해오고 있다는 그. 그렇다. 2000년 완도군항일운동사 대부분의 논문을 작성한 한양대 사학과 박찬승 교수 이야기다.  

핫(HOT)한 그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가장 궁금한 것은 왜 완도항일운동을 연구하게 됐냐는 것이었다.
“제가 목포대 있을 때 도서문화연구소에서 처음 약산, 소안 등 섬 조사를 했다. 그때 항일운동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섬에 있었던 항일운동을 조사해서 논문을 썼던 것이죠. 그 전에도 이미 소안도는 이균영 동덕여대 교수, 그분이 쓴 글이 있었는데, 글을 쓸 때 제가 옆에서 그걸 봤었거든요. 소안도에 대해서는 80년대 중반쯤 됐죠. 그때부터 잘 알고 있었죠”

완도 뿐만 아니라 항일운동사는 해방 이후 좌우익 이념갈등으로 좌익으로 분류된 세력들은 핍박을 받았고, 그런 영향을 완도군도 받아 항일운동을 했어도 말을 제대로 못하고 살았다. 그런 핍박의 시대가 지나고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완도군항일운동사. 그가 보기에도 큰 의미가 있었던 모양이다.
“소안도에 계신 분들이나 그 출신 분들이 볼 때는 명예회복이라고 할까, 그렇게 생각하셨기 때문에 의미가 컸다고 본다”

항일운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교수로서 그에게 일제강점기 전국적인 항일운동이 있었는데 완도의 항일운동의 위상에 대한 질문도 던져봤다. 
“다른 지역도 활발한 곳이 많다. 같이 비교하긴 어렵고... 근데 완도 같은 경우 섬으로 나눠져 있잖아요. 같이 하기 힘들고 불리한 점들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항일운동을 했다라는 것에 그 점을 높이 사야 될 것 같고, 특히 소안의 경우 1920년대 어떤 지역보다도 면단위 밖에 안되는 작은 곳인데 항일운동을 활발하게 했다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긴 힘든 부분이다. 그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고 본다”

완도처럼 그 당시 항일운동사를 정리한 곳이 있었는지 그것도 궁금했다.
“그런 곳이 거의 없었다. 완도의 경우에만 돌아가신 김진택 선생님이 워낙 열심히 하셔서 처음에 소안도 항일운동사 사료집을 내셨고, ‘완도 전체를 내자’ 해서 완도군항일운동기념사업회를 만들고 항일운동사 편찬작업을 진행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그런 경우가 없었다. 전라남도 다른 시·군 어디에도 항일운동기념사업회 이런 게 없었기 때문에 그런 책을 내지 못했다. 최근에 와서 나주가 나주시청에서 의뢰해서 한 것인지 나주항일운동사 책 한권을 냈고, 목포의 경우 개항 100년사 책 낼 때 제가 그때 거기 관계를 해서 논문 몇 번 쓰고 자료집도 내고 했었다”

항일운동을 연구하는 그도 완도, 그중 소안도에서 항일민족해방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난 이유가 궁금했던지 ‘일제하 소안도의 항일민족운동’이라는 그의 논문에서 그런 고민과 함께 사회적, 경제적, 교육적 배경을 그런 답을 대신해 내놨던 그였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 명확한 답을 찾기 위한 연구가 계속되었는지 물었지만 아쉽게도 “진척을 못시켰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완도군항일운동사가 발간된 지 내년이면 20년이 된다. 당시 편찬위원회 참여한 인사들은 미발굴 재판기록과 읍·면 항일운동 내용이 다 들어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많이 토로했다. 지역사회에서 개정·증보판 발간 여론이 일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며 항일운동 연구가로서 그에게 완도군항일운동사를 다시 편찬하게 된다면 어떤 점을 좀 보완하면 좋을까 조언을 구했다.
“그때 신지도가 빠졌다. 나중에 신지도는 따로 만들었다. 모르겠다. 다른 지역 것은... 청산도라든가, 몇군데 다른 섬에 사건들 그런 것들 같이 묶어서 써준다든가 그런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항일운동 연구하는 학자로서 100주년을 맞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도 그에게는 의미가 남달랐다.
“글쎄요. 3.1운동을, 특히 100주년 기념하는 것은 다른 역사적인 사건에 비추면 돌아왔을 때보다 훨씬 의미가 깊다고 보는데요.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면 20세기 한국사에서 3.1운동이 역사적으로 의미가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아마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한국전쟁이나 해방이나 그런 사건도 있었지만 긍정적인 측면에서 역사적 의미가 큰사건은 3.1운동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다방면으로 다양한 방향에서 기념행사가 진행되고 있지 않나. 역사공부를 하는 입장에서 가장 긍정적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3월 1일 지나면 다 잊어버리지 않을까 걱정된다.(하하하)”

마지막으로 그는 완도항일운동을 연구하면서 인연을 맺은 지역과 사람들에게 인사도 전했다.  “사실은 제가 완도항일운동사 연구하면서 완도에 계신 분들한테 정말 도움을 많이 받았다. 여러 가지로 하여튼... 정보도 많이 제공해 주셨고, 심지어 집에서 재워주시기도 하고 밥도 주시기도 하고 정말 도움을 많이 받아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완도는 어찌 보면 제가, 한 지역에 대해 쓴 논문 가운데 완도가 제일 편수가 가장 많다. 다른 지역은 그렇게 써본 곳이 없다. 저로서는 제2의 고향 같은 느낌이 든다. 아무튼 완도에 계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박 교수는 완도군항일운동사 개정·증보판 작업이 시작된다면 동참해 “도와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1차 편찬작업을 추진한 인사들이 생존해 있고, 3·1운동 100주년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는 뜻깊은 해인 올해가 바로 ‘완도군항일운동사’ 개정·증보판 2차 작업을 시작할 적기가 아닐까?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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