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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의 독립운동을 따라가 보다

[언단의 장] 김희태 / 전라남도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03.15 06:15
  • 수정 2019.03.15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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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석균 친필 편지. 수신인 임재갑<신지항일운동기념관 전시> 사진 제공 = 완도군청


편집자 주>  본장에선 3`1운동 100주년과 원불교법인성사 100주년 기념을 맞아 원불교사상연구원 공동학술대회에서 완도지역 원불교인으로 독립운동가였던 오미산, 김영현, 지해원 선생을 조명한 전남도 문화재 위원회 김희태 전문위원의 특별칼럼으로 꾸렸다.

완도 출신 원불교 선진들의 전사(前史)로서 독립 운동 참여한 분들에 대해서 살펴 볼 기회가 있었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과 겸하여 원불교 법인성사 100주년을 기념하여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소에서 마련한 자리다. 2019년 2월 14일. 

소남 김영현(1883~1971)과 미산 오미산(석균, 1889~1973), 근산 지해원(형석, 1912~1986)이 그들이다. 1950년대에 원불교에 귀의하는데, 일제강점기에는 교육운동과 사회운동 등 항일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당대를 살아간 인물들의 시대 대응 방식이나 활동, 인식을 알아보면서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에 대해서 그들의 행적과 독립운동의 궤적을 따라가 본다.

고금-군외 교육운동의 좌장, 소비조합운동<김영현>
소남 김영현은 고금도 청룡리 용지동에서 침천 김광선(1860~1936)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김광선은 유배와 있던 이도재(1848∼1909)를 만나 배운다. 이도재는 해배 뒤 전라관찰사가 되어 완도군 설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김광선은 향도유사가 되어 완도군 설군과 완도향교 건립을 주도한다. 김영현은 불목리에 정착 한 뒤 1910년 융희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교원강습소를 수료한 뒤 1911년 고금보통학교에서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1920년에는 동아일보 목포지국 기자로 있다가 완도에서 ‘소비조합운동’을 벌였다. 완도는 완도사람들이 지켜야 한다는 것. 일본 상인들이 피해를 당하자 검거되어 1심에서 징역 3개월을 언도 받는다.
2심인 대구 복심법원에서는 무죄로 풀려나지만, 일본상품을 배척하는데 앞 장 선 것이다. 1921년 상주로 가서 조명강습소에서 교육을 한다. 1923년 군외면 교인리에 사립교인학교를 세우는데 오석균을 교사로 초빙한다. 1934년 교인학교는 강제폐쇄당하여 군외면 불목리로 옮겨 동명학교를 개교하는데, 이는 고구려 동명성왕의 이름을 딴 것이라 하여 못쓰게 하여 영창간이학교라 한다. 이후 『청해비사』, 『진한국마한사』등을 저술한다. 김영현은 많은 제자를 배출하는데 이들이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한다.

교육운동, 청년회 연설, 신간회 창립<오석균>
미산 오미산(석균)은 완도군 고금면 영창리 출신으로 1914년 3월 경성고등보통학교 교원양성소를 졸업하고 1914년~1919년 사이 완도공립보통학교의 훈도로 활동한다. 1920년 9월 2일에는 목포청년회, 기독청년회, 천도교청년회 등 세 단체가 합동으로 주관한 청년회연합회 강연회에서 강연을 한다. 1921년 4월 20일 경성에서 열린 예수교청년연합회에 목포 대표로 참여한다. 1923년에는 군외 사립교인학교 교사로 참여한다. 설립자는 김영현이다. 1927년 4월 1일에는 완도중학원 개교식 사회, 1927년 7월 13일에는 완도 교육협회 집행위원에 선임된다. 김영현이 사회를 본다. 1927년 8월 28일에는 완도 중학원에서 오석균의 사회로 신간회 완도군지회 창립총회가 열린다.

식민지교육 철폐 동맹휴학 선도<지해원>
근산 지해원(형석)은 청산면 청계리 514번지에서 지상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완도공립보통학교 5학년 재학 때 식민지교육 철폐를 위한 동맹휴학을 선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된다. 출감 후 농촌문맹퇴치운동을 전개 하다가 1932년 일본으로 가 노동조합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20년대에 임재갑에게 보낸 친필 편지가 신지항일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고금학교, 사립교인학교 등 교육운동
김영현과 오석균은 교육운동과 사회운동에 함께 참여한다. 김영현은 1910년~1919년 고금학교에서 교육활동을 한다. 1921년~1924년 사이에는 경북 상주 양진당에 설립된 조명강습소에서 신교육을 한다. 1923년 군외면에 사립교인학교를 설립한다. 김영현이 중심이 되었고 학생들은 170명이었다, 1934년까지 운영하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자 군외면 불목리로 옮겨 영창간이학교를 설립한다. 672명을 배출한다. 1927년~1934년에는 해남군 북평면 서흥리에 동명학원, 북평면 이진리에 동광학원을 세워 운영한다. 1926년 4월에는 중등학교 설립운동이 전개되어 1927년 4월 80명 정원으로 완도중학원이 설립되고 오석균이 교사로 참여한다.
사립교인학교 터자리를 돌아보았다. 숙승봉이 저만치 보이는 황진리 교인마을 복판. 주민들은 단번에 저기 ‘학교잔등’ 그런다. 주민들의 내면에 아직도 남아 있다. 황진리 산28, 2, 4번지 일원. 그러나 황량하다. 중심은 상수도 시설이 들어선지 오래고 한켠에 남은 흔적이라고는 돌담 일부와 학교 입구 도로 포장으로 보이는 콘크리트 바닥. 안내판이라도 있었으면 싶다. 학적 자료 등은 화재로 타버리고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다행하게도 사립교인학교 교가가 『군외면지』에 올라 있다. 체육대회 운동가도 함께. 제2회 졸업 기념으로 찍은 교사들의 사진도 있다. 우리의 관심 여하에 따라 더 많은 자료 수집은 가능 할 것으로 보인다.

소비조합운동과 신간회 창립 활동
김영현이 주도한 완도소비조합(완도상회) 운동은 1920년 8월 17일 완도공립보통학교에서 완도청년회 개최를 할 때 “우리 완도는 완도인의 완도이지 타인의 완도가 아니다. 모름지기 완도인이 이를 지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다만 관리의 명령에만 따르지 말고 자진해서 교육·경제의 개량할 것은 개량하여 완도의 발전· 진보를 계획해야 한다.”는 연설을 한다. 소비조합운동은 뜻대로 되지는 않아 완도상회로 변경하고 김봉현 외 35명으로부터 280원의 출자를 얻어 주임이 되어 제 잡화의 판매를 개시한다. 그러다가 완도 청년회 연설과 소비조합, 완도 상회 등이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일본인 관리 및 일본인을 배척하도록 교사·선동하였다는 죄로 잡혀가 재판을 받게 된다. 광주지방법원 장흥 지청 1심에서는 징역 3월, 대구복심법원 2심에서는 무죄를 받는다.
신간회는 최대의 민족운동단체로 1927년 2월 25일 조직되었는데 완도 출신 송내호가 참여하였다. 신간회 완도군지회는 1927년 8월 28일 완도중학원에서 오석균의 사회로 창립총회를 가졌다. 회장은 임재갑, 부회장은 곽동식이었고 김영현은 간사로 참여하였다.

자료를 찾고 현장을 밝혀 보자
소남 김영현은 1958년 원불교에 귀의하여 불목교당을 설립하였고, 1964년에 전답 1만 6천평을 원불교에 희사하여 현재의 소남훈련원이 만들어졌다. 곁에 있는 청소년수련장은 우리나라 청소년수련원의 시원이 되었다. 미산 오미산(석균)은 1958년 입교하여 1961년 전무출신으로 출가했다. 절체절명의 구도정신으로 중앙총부 예감 등의 역할을 하면서 법회와 교리훈련 등에 열성을 다했다. 근산 지해원(형석)은 1950년 입교하여 이듬해 전무출신으로 출가했다. 수계농원을 운영하여 이사병행 하는 선도량으로 가꾸었고 인재육성 도량으로 만들어 수계농원 출신의 전무출신이 수십 명에 달했다.
소남 김영현의 경우는 소득증대를 위해서 농어촌 근대화를 장려하였다. 소비조합 운동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미풍양속과 효행을 후진에게 몸소 보였다. 미산 오미산(석균)의 경우는 기독교 단체에서 활동하지만, 천도교 등 다른 종교의 청년회와 연합해서 활동하는 이력을 보여 준다. 특히, 소남 김영현과 미산 오미산(석균)이 함께 활동하면서 추구한 교육계몽사업은 항일 의식의 고취라는 시대적 소명과 함께 교육을 통해 평등을 추구했다. 이같은 교육운동을 통해 배출된 후학들은 완도 곳곳에서 일어난 독립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100주년이라는 시대적 소명이 아니더라도 관련 자료를 찾고 기억을 더듬어 기록하는 일, 전하는 이야기도 모으는 일, 현장을 밝혀 소박한 안내판이라도 세우는 것. 그것은 선진들이 피로써 지켜온 뜻을 이어가야 하는 후손된 이들의 당연한 책무이다. 
 

김희태 / 전라남도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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