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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혹한 시대에도 항일 책무 거부 않은 '완도 청년들'

[완도군청년회-완도신문 공동 청년프로젝트] 완도 근현대사 한축 담당 청년회 역사 찾기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9.03.15 10:02
  • 수정 2019.03.15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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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본 특별기획은 완도군 청년회 창립 40주년을 맞아 완도 근·현대사의 한 축을 담당해왔던 청년회의 역사를 조명하면서 미래적 가치를 함양하기 위한 완도군청년회-완도신문 공동 청년프로젝트이다.

우리나라 청년운동은 부침이 많은 편이다. 특히 해방 후 이념대립이 격화되면서 정치적 입장과 이해관계에 따라 사회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자랑하는 청년들은 이용당하기 쉽상이었다.
지역봉사의 중추를 담당하는 완도군청년회가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다. 그래서 본보와 함께 완도군청년회 역사를 정리해 볼 생각으로 완도군청년회와 함께 완도군청년회 역사찾기 프로젝트를 준비하게 됐다. 어느 시대에 청년이 없었겠느냐마는 청년회 모임이 본격적으로 결성된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를 시간적인 영역으로 잡았고, 완도군청년회의 정신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많지 않은 자료에 힘에 부쳤다는 솔직한 얘기도 해야 하겠다. 그럼 본격적인 완도 청년회 이야기를 풀어내 볼까 한다. 

최근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항일운동 기념사업이 벌어지고 있다. 아시다시피 우리 완도는 함경도 북청과 부산 동래와 함께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3대 강성지로 불렸던 곳이다. 완도의 청년들도 엄혹한 식민지 시대에 항일운동의 책무를 거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서 우리나라 전체를 이끌어 나가려 했다.

기록에 의하면 완도읍의 항일민족운동은 1919년 3·1운동으로부터 시작되니 완도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 무산사건이다. 이 사건은 완도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4월 7일 김우진 등을 중심으로 20여명이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하여 다음날인 4월 8일 이를 실행에 옮기려 했었는데 그날 저녁 모두 경찰에 검거된 일이다.

이후 완도군청년회의 활동은 ‘일제하 완도(체도)의 항일민족운동’이라는 2000년 발행된 완도군항일운동사 편찬실무를 담당한 한양대 박찬승 교수의 논문에 잘 나와 있다. 논문에 따르면 1920년대는 청년회가 완도읍의 민족운동에 본격 나서는 때다.

박 교수의 논문에 정리된 내용을 참조하면 1920년 6월 29일 완도 청년들은 완도공립보통학교에 모여 완도청년회를 창립하였다. 이날 선출된 간부는 회장에 나봉균, 총무에 김장렬, 의사부장에 박정욱, 지육부장에 박ㅇ내, 체육부장에 정인주 등이었다.

완도 외에는 소안도에서 배달청년회가 1920년에 지·덕·체의 함양을 내걸고 창립되었고 금일도에서도 적어도 1924년 4월 이전에 금일청년회가 창립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 청산면 청산도와 대모도에도 청년회가 창립되었는데, 청산도에는 1924년 10월 제2회 정기총회를 열었다는 기사로 미루어보아 그 이전에 이미 창립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모도에서도 1923년 9월 개량서당의 후원을 목적으로 하는 배달청년회(1925년 4월 모도청년회로 개칭)가 창립되었는데 이외에 다른 면에서도 비슷한 성격의 청년회가 창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박 교수는 서술하고 있다. 

이렇게 각면의 청년회가 대체로 구성되자 이를 하나로 묶는 완도청년연합회가 결성되었다고 한다. 연합회가 언제 결성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1924년 8월 15일 정기총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상무위원에 나봉균·임재영·김장렬 등이, 중학강습위원으로는 강사원·나봉균·김장렬·김재경·임홍기·신태희·이흥세·우장승·김조헌 등이 선출되었다.

완도청년연합회는 1925년 10월 12일 소안도 노농대성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신준희·최형천·정남국 3인의 환영회를 객사 잔디밭에서 갖기도 하였다. 완도청년연합회는 또 그해 12월 22일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나봉균의 사회로 지방소년운동, 지방세포단체 조직 등의 안건을 협의하였으며, 이를 전담할 위원으로서 최형천·천돈섭·위경양 등을 선출하였다. 또 지방순회강연을 계속하기로 하고 강사로 김장렬·나봉균·정권 등을 선출하였다.

1926년 4월 20일에는 완도노동공제회관에서 제3대 신만희의 사회 하에 정기총회를 열었다. 이날 회의는 토의안건 가운데 이류단체 박멸 등의 문제로 인해 경찰에 의해 중지되어 다음날 다시 열렸으며, 위원으로는 신만희 외 10인이 선출되었다.

한편 1920년대 중반은 완도청년회의 성격이 더욱 확고해지는 때였다. 완도청년회는 1925년 2월 완도무산청년회로 탈바꿈하였다. 이즈음 다른 지역의 청년회들과 마찬가지로 개혁청년회로 변신한 것이다. 완도무산청년회는 그해 2월 28일 완도면 화흥리 개량서재에서 임시대회를 열고 의장 김병규의 사회 하에 청년운동의 전환을 선언하였다. 무산청년회는 청년운동의 근본방침으로서 “계급적 자각으로써 해방운동의 제일선에 설 역군을 양성키로 함”을 정하였다.

무산청년회는 청년교양을 위해 강연회·독서회·토론회·야학 등을 개최하고, 순회문고 및 신문 잡지 공동열람소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이류 청년단체는 개혁 또는 박멸하기로 결의하였으며, 청년회원의 연령을 25세 이하로 제한하기로 하였다.

또 이들은 이날 회의에서 “우리들은 역사적 필연인 합리적 신사회의 건설을 기함”을 내용으로 하는 강령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위원으로서 나봉균·김원일·김동섭·김채곤·김용준·황금성·김양주·이홍숙·최정래·정규선 등을 선출하였다.

완도무산청년회는 1926년 4월 20일 완도군 읍내 노동공제회관에서 제3회 정기대회를 갖고 임시의장 김병규의 사회 하에 청년운동·교양문제·이류단체·농민운동·종교문제·소년운동·청년데이 기념·메이데이 기념 등의 안건을 토의하였으며, 주앙집행위원으로 권표 외 6인을 선출하였다.

완도청년연합회는 1927년 8월 28일 완도청년동맹으로 개편하였다. 이에 따라 각면의 청년회는 모두 해체되고 완도청년동맹의 산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완도청년동맹의 위원장은 신광희였으며, 상무위원으로서는 이월송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완도청년동맹은 11월 7일 러시아 혁명 기념강연을 열려고 준비하였으나, 경찰에서 강연 전에 이를 금지하고 위원장 신광희와 상무위원 이월송, 그리고 신간회 완도지회 간사 최형천·정학균 등을 검속하였다가 다음날 석방한 일이 있었다.

1928년 이후 완도청년동맹의 활동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자료가 없어 그 활동내용을 알 수 없다. 아마도 소안도 배달청년회 사건의 영향이 컷고, 그 영향으로 이후 활동이 부진하게 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다음 편에서는 광주학생운동과 완도청년들의 역할를 주제로 연재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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