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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온 고추 두알, 그리고 환장할만큼...

[에세이-고향생각] 배민서 / 완도 출신. 미국 거주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04.28 12:55
  • 수정 2019.04.28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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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있는 미국 텍사스는 지난 가을 떨어진 낙엽들이 채 사그라들기도 전에 봄이 찾아와 꽃들을 피우는 곳이다. 그렇게 길지 않았던 겨울동안 나는 난생 처음으로 뜨개이불을 짜서 선물을 하기도 했고 틈틈이 그림도 그렸으며 책도 나름대로 많이 읽었던 튼실한 겨울이었다.

1월 말 쯤이었을까? 지인께서 텃밭에서 거둔 잘 마른 한국산 고추 두 개를 내게 쥐어 주시며 잘 키워보라고 하셨다. 단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던 길에 대한 야릇한 흥분으로 설레임은 시작되었다. 인터넷을 뒤져 고추씨앗 발아법을 익히고 씨앗을 골라내어 8~10시간 정도를 물에 담궜다. 그 다음은 촉촉하게 적신 키친타월속에 씨앗들을 펴 넣은 후 지퍼백에 담아 30도 정도의 온도를 유지 하면서 발아되기를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그 날 밤부터 맵싸한 고추씨앗들은 내 침실로 들어와 나와 함께 잠을 청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두근대는 가슴으로 "Good morning!"하며 그들의 안부를 물었다. 4일 째 되던 날 쬐그만 씨앗들이 하얀촉수를 드러낸 것을 발견했을 때 요동치던 내 심장은 그 아이들을 놀라게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 그래, 바로 그 날 부터였었다. 꿈틀거리는 생명들로 인해 나는 분주해졌고, 나 역시 봄으로 움트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Starting mix라는 용어도 모른 채 무조건 달려가 온갖 설명을 주절주절 내 뱉은 후 인큐베이터를 닮은 폭신한 흙을 찾았고 조심스레 그들의 거처를 옮겨 주었다. 카스에서 얻은 정보를 응용하여 스프레이 Bottle에 물을 채우고 두 방울의 매실효소를 희섞한 후 아침 저녁으로 뿌려주던 어느날, 드디어 신비로운 싹이 따뜻한 흙을 뚫고 올라왔다. 아! 그런데......, 이건 뭐지? 기도하고 있는 걸까? 아님 자신에게 생명을 준 씨앗이라는 존재를 찬양하고 있는 걸까? 막 태어난 떡잎들은 모두 다 한결같이 푸른 두 손을 모아 씨앗을 받쳐들고 나온 것이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다 위대해 보였다. 또한 싹을 틔우는 한 순간을 지켜 본다는 것 또한 얼마나 경이롭던지! 이 어린생명들의 간절한 기도는 망막의 시신경 뿐 아니라 음률을 타고 내 온 몸을 전율시키고 있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고아원 원장이라도 되는 듯 초록이들의 장래를 고심하고 있었다. 아직은 어렸지만 종이컵에 보드란 흙을 담아 하나 씩 독립을 시켰다. 맑고 화사한 날에는 햇살을 마음껏 사랑하게 해 주었고, 어떤 오후에는 지나가는 바람을 끌어안고 유연하게 블루스를 출수 있도록 댄스파티도 열어 주었다.

20도를 웃도는 화창한 삼월의 어느날, 한인교회에 올망졸망 고추모종들을 줄 세워 선을 보였다. 텃밭이 있는 사람들은 좋아라하며 와락 안았고 홀로 사시는 노인분들까지 "키워가꼬 입맛 읖쓸때 쌈장에 찌거 무그믄 조컷따야" 하시며 한 놈 두 놈 델꾸갔다.

내게 온 고추 두 알! 환장 할 만큼 찬란하게 펼쳐진 봄, 그래서 나도 덩달아 이쁜 봄?
 

배민서 / 완도 출신. 미국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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