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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헤어짐 뒤 고요하게 만나는 날엔

[완도의 자생 식물] 96. 병꽃

  • 신복남 기자 sbbn2000@hanmail.net
  • 입력 2019.06.08 10:47
  • 수정 2019.06.08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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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게 헤어졌다가 고요하게 만나는 날엔 병꽃나무가 있다. 나도 모르게 슬픔의 길을 걷다가 병꽃나무 꽃잎에 눈물을 묻고 있다. 찬 봄비에 노란 산수유 꽃이 피면 생강나무가 생각난다. 영춘화가 피게 되면 개나리꽃이 노랗게 물이 든다.

진달래가 피고 나면 철쭉이 피고 나무에서는 연초록의 산벚꽃이 피기 시작한다. 야트막하게 핀 풀꽃부터 다양한 색깔을 지니게 되는 현악의 미는 봄맞이 산새 소리에 달려있다. 아주 낮게 아주 작은 싸리눈처럼 싸여있는 봄맞이꽃을 볼 요령이면 청아한 새소리로 하여금 노란 병꽃나무가 빨갛게 익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노란색을 띤 꽃이 차츰 붉은 물감으로 뿌려놓은 주인은 어디에 있는지 아무 말 없이 내어주는 욕심 없는 산사람의 마음이겠지. 처음 꽃망울이 생겨서 꽃으로 피어나는 병꽃은 어느 시기까지는 황록색으로 핀다. 그러다가 조금씩 붉은 기운이 돌기 시작하다가 마지막에는 아주 붉은 꽃이 되어버린다.

꽃모양은 갈라진 나팔 또는 깔때기 모양인데 이런 꽃들이 가지에서 잎이 달린 자리마다 하나씩 나오기 때문에 많은 꽃이 다닥다닥 피어난다. 나무 전체 크기가 2~3m 정도인데 지상부에서 개나리처럼 여러 개의 줄기가 둥그렇게 둘러서서 핀다. 우리나라 자생종이라는 것을 보면 예전에 술병으로 쓰던 두루미병을 닮아 부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병꽃나무 꽃 피는 기간이 근 한 달이나 되니 꿀벌들에게 아주 착한 꽃이다. 이만큼 긴 밀원식물이 있을까. 그 외에는 가지가 잘 휘어져 숯가마 엮는데 썼다고 한다. 예전에 어느 집 화단에서 많이 보아온 꽃이다. 그 후 깊은 산길에서 병꽃나무를 발견하고 놀라워했다. 사람들 주위에서 가깝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산속 깊은 곳에서 세속의 때를 씻고 있다니 깨끗한 절을 찾은 기분이다.

현실 생활의 무미함과 궁핍함을 숲속의 꽃에선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가슴에서 먼저 핏기가 전해오는 것은 세속의 집착을 눈으로 떨어내지 말고 마음으로 먼저 꽃을 만지면 병꽃나무 꽃을 한 달 내내 볼 수 있다고 어느 시인은 말한다.

그리 크지 않아 사람의 눈높이에서 보인다. 불현 듯이 만났지만 마음은 늘 한가롭게 여유를 갖게 한다. 이게 산에서 만난 즐거움이다. 처음 아주 연한 꽃 색에서 점점이 빨간색으로 짙어진다. 변화무쌍한 꽃빛이지만 하나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무미한 존재를 생기 가득한 존재로 이동하는 에너지는 같지만 마음의 질량은 사뭇 다르다. 내 안에 즐거움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있겠지만 꽃빛에서 마음의 섬세함을 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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