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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의 항일운동가 완도 출신 '응송 박영희'

[특별 기고] 정영래 / 완도문화원 원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06.09 09:44
  • 수정 2019.06.09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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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래 / 완도문화원 원장

응송, 박영희(1893-1990)는 김구 선생의 측근 이였으며, 불교계의 지도자 만해 한용운과는 3.1만세운동을 같이한 사람으로 완도읍 죽청리 사람이다.

응송은 1893년(대한제국 고종29) 죽청리에서 박용건의  5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나 불교계에 입문하여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해방 후 청소년 교육에 뛰어들어 완도에 신교육과 계몽에 크게 기여 하였다. 그리고 1990년 1월10일 광주 소재 극락암에서 열반하여 대전국립묘지에 묻혔다. 97세의 노령으로 천수를 누린 사람이다.

응송은 법명이고 영희는 속명이다.  17세 되던 해 평생의 정신적 스승인 황준성 대령을 만나게 된다. 황준성은 1907년 일제의 군대 해산 명령에 불복하여 죽청리로 유배되어 향교에서 훈장으로 모셔왔던 사람이다.  황준성은 밤이면 응송에게 나라에 대한 애국심을 토로하였다. 이에 응송은 자연스럽게 항일에 대한 투철한 저항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여 황준성을 따라 항일민병대에 가입하였다.

1908년 황준성의 항일민병대는 완도에서 결성하여 해남으로 진출하였다. 그때 황준성의 항일민병대에 가입한 사람은 불목리 김재천, 죽청리 박영희, 영풍리 오석균이였다. 황준성은 해남으로 진출하면서 완도의 동지들에게 “지금 내가가는 길은 위험하다. 너희들은 남아서 더 큰일을 하여라.” 하고 떠난다. 완도동지들은 이곳에서 후원금을 모아 지원하였다. 황대령은 그해 10월 해남대흥사 심적암에서 일군의 야습을 받고 괴멸되었다. 1909년 12월에 일경에 채포되어 1910년 2월 광주지방재판소 목포지부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다음해 1910년 5월에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응송의 생애에 가장 큰 인생의 전기는 의병활동과 불교장학생 유학생활이다. 유학은 독립에 대한 의지와 불교에 대한 수행이 구체화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의 생애에 가장 어려웠던 시기가 되기도 하였다.

1919년에 사비장학생(寺費?學生)에 선발되어 중앙학림에 입학한 그는 재학 시절 기미년 3월1일 탑골공원 독립선언현장에 응송은 불교계 인사를 총지휘하였다. 탑골공원 현장에 책임자로서 완도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항일의 자긍심을 심어준 사건이다. 응송은 3.1만세 시위현장에서 부상을 입고 바로 완도로 내려와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오석균과 송내호에 전달하면서 3월15일 완도보통학교에서 거사할 것을 부탁하고 해남으로 돌아갔다.  그로인하여 남도지역에서 3.1만세운동은 하동 쌍계사에서 3월13일에 있었고, 다음으로 완도보통학교에서 만세운동을 하였다. 모두 응송에 의해 시도되었으며 전남에서 완도가 가장 빠르다.

응송과 오석균은 친구사이다. 송내호와 이사열 역시 같은 연배로 모두 친한 사이였던 것 같다. 송내호가 세브란스병원에서 작고하였던 것도 오석균 부인이 그 병원 수간호사였기 때문에 병원에 입원했다고 보고 있다. 이사열의 아들 이기흥은 오석균의 사위이다. 따라서 당시 완도에서 항일운동을 하였던 사람들은 서로 인맥으로 결속되어 있는 비밀결사조직 이였다.

불교계의 항일운동 행사에 응송이 있었다면 기독교계 항일에는 송내호가 있었다. 두 축은 종교계의 항일운동을 주도하였던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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